우울증은 결코 정신과에서 다루어야 하는 병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 (고전 4:20)는 말씀은 사도행전 당시나 혹은 그 후 초대교회 시절에만 해당되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대에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유효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말씀과 능력 … 이러한 단어들은 어느 특정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유효한 말씀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아주 친숙하고 가까운 말씀이다. 교회사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을 지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왕성해가며 또 많은 이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거리의 부량자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말씀으로 돌아오며 세상에서 말하는 패배자들과 죄인들이 말씀을 듣고 회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끌어 갔던 것들을 기억해 보면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크시며 죄인 된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얼마나 큰지 새삼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영역과 세상 학문의 영역이 넓어지고 다양한 사조나 풍조들 그리고 사상들이 난무하는 속에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세상과 얼굴을 맞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세상의 것들을 흡수하고 또 모방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금지하고 있는 것들도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흡수하여 교회에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심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세상은 물질만능주의나 헛된 철학이 정복하여 지배해 가고 있다면 그러한 것들의 영향이 교회 안에는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둔갑하여 사용되어지는 것들을 본다. 이러한 사용을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의 것들로 둔갑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기독교상담자들이나 정신과 의사들 특히 기독교인이면서 정신과 의사인 사람들이 교회 안이나 기타 세미나 장소 혹은 개인적인 사역(?)을 통해서 “현상학적” 혹은 “병리학적” “임상적인” 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는 교회 안에서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용하라고 하신 성경적인 언어는 결코 아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는 이들이 무슨 의도로 사용하는 지는 모르지만 기독교상담자라고 하는 이들도 대부분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 함으로서 자신들이 무슨 치료자(?) 혹은 병을 고치는 능력있는 의사나 되는 듯한 우월감에 빠져서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는지도 모른다. 용어의 구분이나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의에 의해서 그 사람이 평가 될 수는 없지만 그 용어가 주는 뉘앙스에 따라서 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교인들의 생활속에 나타나는 죄의 문제들과 거친 모습들 그리고 삶의 문제속에서 발생하는 대인관계의 문제들 혹은 옛 자기의 모습들을 [현상학] [병리학] 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하면 교인들이 모두 치료받아야 할 [환자]로 바뀌게 된다. 당연히 그러하다.

저 유명한 수정교회의 슐러(Robert Shuller)목사처럼 교인들이 새로운 개혁을 통한 변화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가 배운 심리학적인 원리들을 목회에 적용한 결과 교인들이 말씀을 통한 죄의 회개와 변화를 겪어야 하는 성도들임을 망각한 나머지 새로운 개혁(Reformation: 슐러가 말하는 개혁은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이 아니다)을 통한 성도들의 변화에 초첨이 맞추어져 있다. 죄와 회개 은혜와 용서 등의 개념보다는 긍정과 적극, 변화와 창출되는 부, 새로운 시각을 통해서 보는 열린 신세계의 개념 등으로 성경을 바꾸어 설명한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생각하면 우울해지고 또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죄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항상 밝은 모습으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살라는 식의 비성경적인 주문을 함으로서 성도들이 죄와 회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의 개념을 잃어 버리게 만든다. 죄가 주는 영향력 때문에 가지게 되는 죄책감이나 혹은 극심한 죄로 인하여 찡그러진 얼굴들을 모두 다 환하게 펴주는 새로운 복음이 바로 슐러의 긍정적인 사고 방식의 복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성경적인 생각들과 관점들이 학문 혹은 임상 이라는 개념들을 타고 교회 안에 흘러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적인 사상들이다. 슐러의 교회에는 대부분 세상이 말하는 우울증환자들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죄의 문제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극심한 죄를 지은 사람일수록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살면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수정교회의 예배시간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슐러식의 복음을 가진 사람이 큰 복을 받고 엄청난 거액을 헌금하고 또 그 헌금자를 소개하면서 박수를 치는 행위를 하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자신들도 그러한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는 동기가 포함된 행동들을 유발해 낸다. 이러한 것을 슐러는 “복음의 능력”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결코 새로운 개혁도 아니고 복음의 능력도 아니다. 세상의 것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인 됨이나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비성경적인 헛된 철학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는 죄 속에서 헤매이는 사람들의 모습, 죄의 속성과 오염에 대해 단 한번도 [실수] 혹은 [질병] [장애] [병] 등등으로 언급하지 않으셨다. 또한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속에 [임상] [현상] [병리]등등과 같은 단어를 성경에서는 보여주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교회에서 자주 사용해야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라져버린 성경적인 단어 [죄]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병리적인 모습은 [환자]들의 모습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성도들의 모습에서 [병]이라는 단어를 찾으려는 의사나 상담자들이 있다면 이들은 죄의 속성이나 인간의 타락된 성품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가장한 헛된 세상의 철학을 추구하는 사람일 수가 있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말은 - 죄인이 분명히 회개하고 중생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속성이나 옛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병리적인 모습]이 결코 아니다 ? 라는 것이다. [정신병리] 라는 단어보다 [성화] 혹은 [푯대를 향하는 삶] [이루어 가는 구원] 등등과 같은 성경적인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죄악 된 자신의 모습 때문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며 날마다 자신을 쳐서 십자가 앞에 복종시키는 삶의 모습은 [병자]의 모습이 아니라 [성화를 이루어 가는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목회사역의 현장 속에서 보면 … 성도들이 이상한 모습을 보이거나 알코올, 약물 등등과 같은 것에 중독(?)된 모습(사실 개인적으로는 중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죄, 약물을 통해 자신의 몸을 망가트리는 죄 … 라고 부른다)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인들을 다루려고 하지 않고 교인 중에 있는 정신과의사나 기독교상담자 혹은 타 교회에 있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들을 본다. 참으로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이 시대를 사는 주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지키심과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한국교회의 목회역사에서 1960-80년대 초반에는 우울증이나 정신병이 교회 안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쩌다 보면 교회 안에 간혹 한 두 사람의 정신병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러는 이러한 사람들을 정신병자라고 말하기 보다는 귀신들림(?)으로 보는 경향이 더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온 교회가 기도하기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많이 떠났고 또 이러한 사람들을 담당하는 일은 어느 특정 이단집단에서나 하는 이상한 행위처럼 치부되어 별로 관심을 갖지 못하고 그러한 사람이 있는 구역조직이나 기타 모임에서 조용하게 기도함으로써 마무리를 지으려는 노력들을 한다.

1990년대 이후부터 한국교회는 귀신들림이나 영적인 문제를 앓고 있는 사람보다 우울증이나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타났다. 공공연히 이제는 메스컴이나 TV 그리고 교회 안에 들어와있는 기독교상담자들을 통해 우울증이나 기타 정신병들이 교회 안에 소개되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이러한 성향이 있는 성도들을 병원으로 보내는 실정이다. 2008년 오늘날과 같은 경우는 대대분의 우울증이나 정신병이라고 명명되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교회나 목회자들은 정신과 의사에게 맹목적인 의존을 한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목회자 위에 군림하는 정신과의사들이 전하는 심리학적인 피흘림이 없는 복음(?)을 더 믿는다.

정신과 의사들이나 우울증과 같은 정신과적인 병이라는 것을 다루는 사람들은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는 말을 한다. 실제로 감기가 일상에서 많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감기를 앓다가 회복되고 하는 과정을 계속하듯이 이 우울증이라는 것도 역시 사람들이 많이 앓다가 회복되는 병으로 본다. 특히 이것은 의학적으로 아무런 증명도 없는 [마음에서 앓는 감기]라는 모호한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정확한 말을 만들어 낸 이 말을 귀담아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도들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만들어낸 [마음] 이라는 단어를 유심히 살펴 보아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 “The human heart is most deceitful and desperately wicked.” (렘17:9) 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는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Who really knows how bad it is?” 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계시지 않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17:10-14) 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마음을 다루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 한 분 밖에는 계시지 않다.

우울증이나 정신과적인 질병이라고 명명되어진 많은 병들은 실제로 그 원인에 대해서 의사들이나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잘 모른다. 다만 의학서적이나 기타 외국의 의학서적에서 말하는 원인을 답습해서 공부해서 알 뿐이다. 그나마 명확한 것들은 별로 없다. 거의 모든 이론들이 가설일 뿐이다. 검증되어진 정설과 가설의 구분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입증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많은 대중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왜 이러한 문제들이 생기냐고 묻는 질문에 1) 생물학. 유전적인 원인, 2) 사회. 환경적인 원인, 3) 심리. 정신적인 원인, 4) 문화, 개인적인 원인, 5) 신경전달물질의 부족이나 결핍 혹은 과다의 원인 등등 많은 이론들을 중심으로 한 가설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따르고 있는 어떤 이론을 중심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만 어느 한 가지도 분명하게 검증된 것은 없고 다만 “이런 원인 때문 일 것이다 라는 말로 자신들의 자신 없음을 말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정신병원이나 심리테스트를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물어보라. 왜 우울증이나 정신병 혹은 장애가 생겼는지를 물어보면 틀림없이 그들은 자신없는 자신들의 말을 할 것이다. 무슨 원인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겼는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병(?)이 낫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흔히들 정신과 의사들이나 이 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 인간은 누구나 정신병을 조금씩을 가지고 있다 ? 라는 말을 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정신병이 있을 수 있다고 말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말을 하는 의사 본인도 정신병자라는 결론을 가지게 된다. 정신병자에게 정신병을 맡기는 결론 … 과연 이러한 해프닝을 연출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무엇 때문에 성도들을 보내는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 부족해서 성도들의 삶을 다루지 못하는 것일까? 실제로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마음일 것이다.

우울증은 질병이 아니다. 신체의 질병이나 장애 등으로 사람들에게 우울증의 느낌을 줄 수 있으나 많은 우울증이라는 증상과 질병 (일시적 혹은 만성적)이 비성경적 습관이나 환경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죄성의 반응의 결과 때문일 수가 있다. 비성경적 생활에서 오는 우울증은 죄를 성경적으로 다루고 분명하게 주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으로 살면 분명히 극복될 수 있다. (창4:3-7, 특히 7절; 시32:1-5; 42:11; 55:22; 119:28, 50, 75-77, 143, 165; 요15:10-11; 고후1:3-6; 약1:22-25에 근거). 이러한 비성경적인 사람들의 패턴이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죄책감이나 마음의 고통은 종종 세상이 말하는 우울증과 같은 증상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이것의 결정적인 원인에 대한 것을 말한다면 분명히 죄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말 할 수 있다. (창4:3-14; 시32:3-5, 38:1-10에 근거) (Ref. Self-Confrontation by BCF pp 319-321) 즉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서 살면서 자기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자기 중심의 생활을 고백하고 성경적인 삶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시32:3-4, 38:1-4; 골3:25; 히12:5-11)

우울하게 느끼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오늘 날 우울증이라고 하는 증상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말하는 우울증이나 기타 정신적인 이상이 생긴것이라는 문제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제시하고 계신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의 마음의 부패와 거짓됨 그리고 타락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것들로부터 놓임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계심으로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보여 주고 계신다. (시19:7-14, 119:165; 잠16:25; 고전1:25, 3:18-20, 10:13; 딤후3:16-17; 벧후1:2-10; 요일5:4-5에 근거). (Ref. Self-Confrontation by BCF p. 319)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