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未來를 위한 敎育의 改革을 위한 硏究 4

(韓國近代敎育의 始作과 發達의 歷史的 考察)(1884-1945)

칼럼리스트 金 昌 龍 牧師(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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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정척사사상(爲政擲柶思想)

위정척사사상은 양반 유생계급이 성리학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이를 강화 정비함으로써 새로이 대두한 서구열강의 도전을 극복하고자 한 사상이다. 위정척사란 ‘정’을 지키고 ‘사’를 배격한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정은 중국과 우리나라와 같이 유교적 국가를 말하며 숭상의 대상이고 ‘사’란 왜와 양을 뜻하며 배격의 대상이 되었다. 위정척사사상가들은 서양의 교역과 사용을 국가적으로 금지케 하면 서양의 문물이 소용없게 되고 그들과 교역하는 일이 없게 되면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어찌할 수 없어 돌아가게 될 것이라 믿었다. 위정척사사상은 나를 지켜서 남의 침략을 막는다는 보수적이고 체제 유지적인 사상체제이다. 위정척사사상은 일제하 의병활동운동으로도 연결되었으며 민족의 현실적 위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2. 한국 근대교육의 수용

1) 외국정세의 파악과 소개

개화기 신문화의 유입은 외국에 사절단과 유학생을 파견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1876년에 김기수를 중심으로 한 75명의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한 것을 비롯하여 4년 후에는 김홍집 등 58명을 수신사로 파견하였고 1881년에는 박정양 등 60여 명의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였다.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이들은 일본의 군사, 교육, 산업, 행정 등의 발전된 모습을 소개하면서 신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에 김윤식을 영선사로 하여 60여 명의 유학생을 파견하였다(1881). 이들은 천진에서 서양식 무기제조법과 그 조련법을 배웠다. 개화이후 조선인의 해외유학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간 유길준이 그곳에 남아, 후꾸자와 유끼찌가 세운 경응의숙에서 수학한 것이 최초이다. 유길준은 그후 미국에 유학을 하여 서구의 각종 문물을 돌아보았다. 귀국 후에는 서유견문을 써서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1883년에는 김옥균이 서재필 등 61명을 선발해서 일본유학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2) 서양인 교사의 초빙

조선은 1881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새로운 국제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임오군란 후 정부는 관제를 다시 개혁하였으며 1883년에는 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독일인 묄렌드르프(P. G. Von Mollendorf)가 동문학을 설립하여 통상아문의 부속 기관으로 두었다. 동문학은 할리팍스를 주무교사로 하여 영어를 가르쳤으며 이곳에서 수학한 학생들은 정부의 자강 추진정책에 실무자로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1886년에 육영공원을 설립하였는데 여기에도 서양인 교사를 채용하였다. 육영공원의 교사는 미국인 헐버트, 길모어, 벙커 등 3인이었으며 중국인 당소의도 교사로 있었다. 육영공원은 1894년 영국인 허치슨이 인수하여 교명을 영어학교로 바꾸고 수업을 계속하다가 갑오개혁 이후 관립영어학교의 하나로 개편되었다. 모두가 외국인으로 영어로 말하고 영어 책으로 교재를 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