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未來를 위한 敎育의 改革을 위한 硏究 -5-

(韓國近代敎育의 始作과 發達의 歷史的 考察)(1884-1945)

칼럼리스트 金 昌 龍 牧師(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

 

상임이사 김창룡 목사(언부협 실무총재).jpg

3. 한국 근대학교 초기 설립의 의미

1) 민간 선각자들에 의한 근대학교의 설립

우리나라의 근대학교의 설립은 1883년 개항장인 함경남도 원산의 지방민에 의하여 설립된 원산학사이다. 遠山學舍는 개항 후의 사회적 변화에 대하여 원산민과 일부관료들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이는 개항 초기에 서당을 개량하여 자제들은 교육하다가 1883년에 근대학교로 전환시킨 것이다. 원산학사는 당시 덕원부사인 정현석이 원산학사를 운영하는 지침으로 학사절목을 제정하여 운영하였다. 원산학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생정원은 문예반 50명 무예반 50명이다. 입학자격은 덕원군민, 타 지역사람으로 입학금을 내는 사람, 그리고 무예반은 제한이 없다. 교사는 교수 1, 장의 2, 장재유사 2명을 둔다. 학교사무관리는 도유사를 둔다. 교과목은 산수, 격치, 기계, 농업, 양잠, 체광, 국어(일어), 법률, 만국공법, 지리 등이었다. 그리고 학교의 재정은 원산 군민과 관리 등이 출현한 자금을 기반으로 했다.

 

원산학사는 다음과 같은 교육사적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근대학교이다. ② 민간인과 관료들이 자발적으로 자금을 출자하고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③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는 학교의 설립이다. 전통적 서당교육에서 근대학교로 변환하여 설립하였다.

 

민간인에 의한 사립학교의 설립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부산의 개성학교(1896), 서울의 정선여학교(1897), 흥화학교(1898) 등으로 매년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1905년에 사립학교 수는 모두 220개가 되었다. 민간인에 의하여 설립된 사립학교는 특히 1905년 이후에는 사립학교운동은 애국계몽운동으로 더욱 촉진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는 교육 구국활동으로서 청소년들에게 교육을 통한 애국심 독립정신 민족정신을 배양하기 위한 전국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교육구국운동에 활동하는 사람들은 교육을 통하여 문명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면 일본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가 벗어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전국적으로 사립학교설립을 촉진하여 수천 개의 학교설립이 되어졌다. 일본통감부는 사립 학교령(1908)을 제정하여 억제하였으나 1910년에 학부로의 설립인가를 받은 학교 수는 기독교계 포함하여 2,250개교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사립학교의 설립은 교육사적인 의미가 크다. 사립학교운동은 교육을 통하여 국가의 개방정책에 의한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고 외세에 의한 침략에 대응하는 국민정신의 발현이다.

 

2) 정부주도의 근대학교의 설립

국가에서는 개방정책의 실시에 따른 국가 체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인재양성이 급선무였다. 국가에서는 개방정책에 따라서 1880년대에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외국어 특히 영어 해득자가 필요하였다. 영어 해득자 를 위한 영어교육기관으로 동문학(1883)을 설치하였다. 동문학은 통리교섭 통상아문의 협판 겸 총세무사인 독일인 묄렌드르프의 제의로 설립하였는데 통역요원을 양성하였다. 그래서 동문학 을 통변학교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동문관 을 모방하여 동문학 이라고 했다.

 

동문학의 학생은 40명으로 주로 영어와 일어를 교육받았다. 동문학 은 1884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육영공원이 설치되는 1886년에 폐교되었다.

동문학 은 통상아문의 부속기관으로 통역관을 양성하는 독립된 교육기관의 성격은 아니다. 그러나 영어교육기관으로 정부가 설립한 근대적 교육기관이라는 의미가 있다.4)

 

동문학을 폐지하고 정부에서는 育英貢院(1886)을 설치하였다. 육영공원은 1883년에 민영익 등의 보빙사 들이 미국시찰을 한 후에 건의되었다. 보빙사 일행은 미국 파견을 마치고 난 후 왕에게 새로운 개혁의 하나로서 교육기관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고종은 1884년에 이를 허락하고 정부는 미국인 교사 3인을 초빙하여 설치하게 되었다. 18867월에 헐버트(H.B Hubert)가 내한을 계기로 육영공원을 설립하였다. 육영공원절목은 국가에서 제정된 것으로 그 내용이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의 학제적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제 규칙은 18개로 되어졌으며 그 내용은 구미식 학교운영의 기본 준칙과 그 지침을 제시하였다. 육영공원의 입학생은 좌원과 우원 으로 나누어서 선발하고 좌원에는 나이 젊은 현직관리로 우원 은 젊은 수재들로 20명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수업연한은 3년이고 2학기제로 운영되었다 교육내용은 영어교육이 중심이 되었다. 영어로 강의하고 교과서(수학 자연과학 역사 정치학 등)도 영어로 된 것이었다. 졸업생은 관리로 등용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당시 추진하던 근대 정부기관에 취업을 하였다.

 

육영공원은 1893년에 영어학교로 개편되고 1894년에 학제를 정비하는데 관립외국어학교(영어학교)가 되었다. 국가에서 개항 이후에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과도기적으로 수급하는 수단으로 근대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운영한 발전과정을 살펴보게 된다. 갑오개혁 이후 정부에 의한 근대교육기관들은 국가의 공교육으로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