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未來를 위한 敎育의 改革을 위한 硏究 (3)

(韓國近代敎育의 始作과 發達의 歷史的 考察)(1884-1945)

칼럼리스트 金 昌 龍 牧師(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

 

2 김창룡목사님.jpg

지난호에 이어...

대원군은 거대해진 외척세력을 제거하고 새로이 왕권체제를 회복하는 정책을 시행했으나 과도한 개혁정치로 인하여 재정의 파탄과 민중의 원성을 사게 되어 결국은 반대파의 정치세력에 의하여 실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외척세력으로 민씨 일파가 대두되었다. 19세기말 조선의 정치체제는 중세적 타성과 인습에 얽매여 사회민중으로부터 격리, 고립되어 있었다. 즉 정치세력은 정치체제의 기강문란과 국민에 대한 가렴주구를 행하는 한낱 이익집단에 불과하였다.

 

경제적으로는 17세기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의 증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생산의 근거인 토지가 지주 계층의 독점지배로서 농민에게 적절한 분배가 없었다. 그리고 지주계급인 양반 관리 유생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생산자인 농민은 생산도구의 소유에서 유리되었다. 그럼으로써 농민은 의욕을 잃고 이탈되어서 지주계층과 봉건지배자들에게 질시와 불신을 가지게 되어서 진주민란과 홍경래란 등의 농민투쟁을 유발하였다.

 

사상적으로는 국가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은 양대 병란 이후 민중의 의식변화로 그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17세기에 일부 실학자들에 의한 개혁의지가 있었으나 실현이 되지 못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사회 민중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직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3) 민족의 저항과 자성

)동학사상)同學思想

동학사상은 최제우에 의해 포교된 사상으로 주체 세력을 농민계층에 두고, 서학에 대한 대항과 도탄에 빠진 농민을 구제하는 사회개혁의 사상이다. 전통적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에서 이를 역전하여 천의 중심에서 인간을 중시하는 “인간은 곧 하느님”이라는 시천주 사상을 정립하였다. 즉 인간은 모두 똑같은 하나의 한울님(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으므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동학에 교화되면 지상천국이 건설되어 서양의 오랑캐가 물러나고 국민은 행복하게 생활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동학사상은 농민층에 커다란 지지를 얻고 전국적으로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894년 동학세력은 집권세력이 농민의 수탈에 정신이 없을 때 이에 항거하여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하여 전라도와 충청도의 일원을 장악하고 정부군과 대치하였다. 그들은 농민들이 요구하는 사회개혁 즉 노비제도와 반상차별제도의 폐지, 농민에 대한 고리대금업의 금지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에 진압되어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우리나라가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학의 사상은 인간중심 사상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아동과 부녀자들에 멸시적 인식을 변화시켜 평등하게 그들을 대하였다. 부녀자들을 보호하고 특히 임신한 여자가 보이면 동학도는 옆으로 비켜서서 보호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아동에 관심을 가져서 이후에는 동학도인 방정환은 한국 어린이를 위한 동요 동화 등을 만드는 사상적 결실을 가지게 하였다.

 

()개화사상 (開化思想)

개화사상은 서양의 선진적 제도와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국가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개화사상은 개항을 주장하여 외국과 접촉을 촉진시키고 외국에 인재를 보내어 문물을 견학시키고 유학을 장려했다. 그리고 개화 사상가들은 근대사회 발전의 주역으로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1884년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여 국가개혁을 단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패하여 망명과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개화사상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양의 과학기술은 선진기술이니 이를 적극적으로 습득하여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동양의 과학기술이 낙후된 것은 사회제도 상에도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므로 국정전반을 개혁하여 사회제도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셋째,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으로는 종래의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 근대국민국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음호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