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믿는 자의 인생은 깊이와 길이의 여정이다. 이 여정은 깊고 깊어서 그 끝을 짐작할 수 없고, 길고 길어서 영원까지 잇대어 있다. 아무리 깊게 내려간다 하나 바닥에 도달하기 전에는 그 밑을 안다 할 수 없고, 아무리 열심히 달린다 하나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면 여전히 결승점을 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능력은 거기까지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고 엎드려야 했다. 입이 있어도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름을 인정해야 했다(사 55:8). 인간이 정직하다 한들 어찌 하나님의 정직에 이를 수 있으며, 감사한다 한들 어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창조주의 자비를 구하여야 했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은 이런 형편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내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도저히 이해도 상상도 되지 않지만 이미 죽은 인간에게 한 가닥 살 길이 주어진 것이다. 그 분 안에만 있으면, 새롭게 태어나기만 하면, 이 세상 살 동안에도 조금은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다 하신 것이다(빌 4:13). 이제야 진정으로 흐르는 강물의 노래 소리를 듣게 되고, 이름 모를 들꽃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이 온통 거짓과 부정, 불평과 불만, 고통과 분열과 당쟁, 시기와 탐욕과 분냄으로 시끄럽기만 하다. 기윤실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데 조금이라도 쓰임을 받고자 오랜 세월동안 한시도 쉼이 없이 달려왔다. 그러나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시 62:1)? 하나님을 위한 일에 열심을 내기 전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그 분의 임재를 온 몸으로 받아 드림은 어떨까? 그리하여 종일토록 하나님과 같이 걸으며 그 분의 무궁하심에 접붙임바 되면 어떨까? 그리하여 세상이 도저히 알지 못하는 깊이까지 내려가 보며 세상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영원에 잇대어 본다.

그토록 메말랐던 가슴이 은혜의 비로 촉촉해지며, 끝도 없는 일에 파묻혀 늘어졌던 팔에 새 근육이 돋아난다. 얕고 허울뿐인 정직이 새롭게 태어나며, 진심이 빠진 혀만의 감사가 아름다운 향기 되어 온 세상에 퍼져 나간다. 인간의 한계도 그에 따른 변명도 멈춘다. 기윤실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비록 짧은 봄, 하루를 산다 하여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주께서 말씀하시도록 잠잠히 듣는다. 예수님의 체취가 기윤실을 감싼다. 축복의 봄이 그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