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화(Globalization)는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은 우리 사회로 하여금 자기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반성과 단일 문화권의 인식의 한계를 동시에 성찰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최근 한국사회도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만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순수 혈통과 민족 문화에 기초한 동질성으로 한국사회도 유지되지 않는다. 한국사회 안에서 새로운 현상으로 떠오르는 문화적 인종적 다원주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신학을 요구한다.

근대이후의 다원적 사회에서의 인간 문제와 억압의 상황은 계급과 성의 차별을 넘어 인종과 문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더 복잡한 양상을 뛴다. 우리사회의 새로운 타자로 떠오르는 이주노동자, 다문화 가족 등 이 시대 소수자들에 대한 새로운 신학함이 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최근 한국사회의 나타나는 중요한 이슈 중에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족들에 대한 차별적 태도는 인권의 유린과 노동의 착취와 맞물리면서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서구 백인외국인들과는 차별되게 동남아 근로자에 대한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가장 열악한 노동의 조건과 삶의 상황 속에서 극대화되고 있다. 복음적 관점에서 다양한 그룹과 소수자들에 대한 신학을 건설하기위하여 해석학적 패러다임과 기독교적 신앙의 본질에 대한 재조명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적 관점이라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예수의 생각방식이다. 예수처럼 생각하기위해서 예수의 정신을 소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해석학적 원리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되어 있다. 구스타프 구띠에레즈의 말대로 믿음의 위대한 해석학적 원리는, 즉 모든 신학적 추론들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특별히 이 시대 소수자들을 위한 주변부신학이 복음의 본질을 대변해야하는 중요한 이유는 예수 자신이 주변에서 살아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결코 중심에 있지 아니하였고 중심에 선 존재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수많은 성서적 증인들이 이것을 정당화한다. 그 당시 중심에 서 있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학자, 서기관 그리고 로마인들은 예수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조차 낯선 사람(stranger)이었다. 더욱이 히브리서(13: 12-13)는 예수는 자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촌 밖에 있는 혹은 이스라엘 밖에 있는 존재로 묘사한다. 그는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로부터도 거부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납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곧 주변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는 버림받고 (outcast) 의지 할 데 없는 거절당한 자들의 친구였다. 요한복음 1장 11절 예수는 그 시대 지배적 그룹으로부터 배척당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 조차 거부되어진 존재로 묘사된다. 예수는 중심에서 철저히 멀어진 주변인들 그리고 중심으로부터 소외된 자들 즉, 세리, 이방인, 여성, 가난한자, 억압받는 자, 병든 자, 버려진 자들의 친구였다. 그는 주변인 중에서도 가장가장 자리에 계신 분이셨다.(The Margin of Marginality: 히 13: 12-13 막 8: 34-35)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예수의 삶은 거처가 없으신 거리의 사람이(homeless)였다(마8; 20).

이주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족들은 두 사회에서 두 문화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으나 그러나 두 쪽에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은 삶으로 복잡한 정체성의 형성 과정에서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어야한다. 이 두 세계는 항상 평화롭게 공존하기보다는 자주 갈등의 원인으로 혹은 극단적으로는 적대적인 상황을 생산해낸다. 지배적 사회에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사회의 뿌리 때문에 그들을 거부한다. 즉 그들은 두 사회에서 모두 원하지 않은 삶들이다. 두 사회에 속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도 속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변부 신학은 아무데도 속하지 않지만 동시적인 두 세계를 모두 살아가신 전 존재로서의 그리고 동시적 존재로서 예수를 이해한다. 예수는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으로 동시적으로 살아가신 분이시다. 예수는 거부되어진 주변부의 사람이었지만 그는 갈라진 세상의 화해자였고 유대인과 이방인, 여자와 남자, 그리고 율법과 은총사이에서 진리에 따라 살아간 새로운 주변인이었다.

궁극적으로 예수는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고 저 세상을 향하시나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분 이셨다. 거룩하신 분이시나 거룩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고 지극히 작은 자들과 동일시 하셨으나 작은 자들이시지 않은 존재이다. 예수가 존재한 자리는 전적인 부정(total negation)과 동시적 수용(total acceptance)의 관계성사이에서 독특한 의미체계를 갖는다.

우리사회의 소수자들은 중심성(centrality) 또는 힘의 중심(the center of power)에서 멀어진 차별의 대상들이다. 소수자를 위한 주변부 신학은 중심적 상황에서 바라보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주변부의 상황을 고려하고 주변부의 사람의 경험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신학이다. 어떤 신학도 모두를 대변할 수 없고 누구도 시공간의 제한을 넘어서고 편견을 뛰어넘는 모두의 신학을 말할 수 없다. 즉 개인의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상황은 자신의 개인적 신학을 반영 한다. 즉 신학과 삶은 분리되지 않으며 신학함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적 이론과 신학적 실천으로 공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수자 신학의 중요한 삶의 자리인 주변부는 소수자들의 신학 함에 중요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주변부는 소수자들의 위한 신학의 자리일 뿐 아니라 주변부 그 자체가 소수자들을 위한 신학의 방법론적인 제시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심에선 관점보다 주변에선 관점으로 살아가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주변부 신학하기는 단순한 사유의 공유이기보다는 구체적 공간의 공유와 그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경험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권력과 힘의 중심에서 늘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시대 소수자들과의 공통된 삶의 자리에 머무시려는 의도적 노력이다. 중심에서는 주변부의 경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경험을 공유하고 함께 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위한다고 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변부의 삶을 살아오신 예수는 그래서 세리와 창녀와 과부와 고아 그리고 병든 자와 소외 받은 자들에게로 늘 다가가셨다.

그러나 중심과 관계되지 않은 주변은 없다. 중심은 주변을 만드는 중요 요인이다. 따라서 주변의 변화는 중심의 변화와 항상 관련한다. 중심에서 생각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주변에서 생각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까? 예수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때 가능하다. 주변부에서 멀어질 때 신학은 중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정신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흘려야하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강물처럼 흐리게 하기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쉼 없이 아래로 향하여야 한다. 예수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물으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