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의 종교상황… <한국 기독교의 역사 Ⅲ> ‘6ㆍ25 전쟁과 교회

 (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김흥수)는 최근, 해방 이후부터 20세기 말까지 한국교회의 역사를 다룬 <한국 기독교의 역사 Ⅲ>을 출간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1989년)과 <한국 기독교의 역사 Ⅱ>(1990년)가 나온 지 약 20년 만이다. 이로써 한국 기독교의‘통사(通史)’가 완성됐다.

 해방 이후부터 20세기말까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은“한국교회 문제가 6ㆍ25 전쟁을 겪으면서 발생하고 강화되었다"고 진단한다. 남북한 교회에 남긴 상처, 남한교회 내 교단 분열, 기복신앙의 확산 등 대부분의 문제가 6·25 전쟁에서 파생했다는 것이다. 이에 본지는 6ㆍ25 전쟁 59주년을 맞아 이 책이 기술하고 있는‘6ㆍ25 전쟁과 교회’내용을 정리 3회에 걸쳐 게재한다.


▲영락교회에서 개최된 목회자수양회(1954)?뉴스미션

새로운 종교현상… 기도원과 신비 체험

625전쟁 후의 교회는 오래된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혼란스럽고 낯선 문제들을 맞이했다. 일제 때의 신사참배와 관련된 해묵은 갈등과 불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1930년대에 고조됐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 간의 신학적 대립이 다시 격화됐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다른 쪽에서는 기도원을 중심으로 은사집회가 확산돼 갔고, 영향력을 가진 이단적 단체가 발생해 기독교 신앙공동체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전쟁이 끝나자 기도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집회 참여자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박수를 치며 찬송가를 부르는 집회는 전통적인 예배 형식과 다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곤 했다. 성령체험의 표시로 방언, 예언, 입신, 신유 등의 신비스런 종교현상이 중시됐으며, 참가들은 이러한 것들을 체험하고자 했다.

기도원 이외에 사설 예배소와 안수 기도소들이 새로 생겨, 이른바‘은혜자’를 중심으로 가정집에 모여 안수기도로 병을 고치는 현상도 생겼다. 특히 안수의 변형 형태로, 기도 받는 사람의 아픈 부위를 어루만지는‘안찰’이 평신도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변계단은 1953년 여름부터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병자들을 안찰해 주었다. 전도관의 박태선은 그는“죄로 인해 생긴 병은 배를 안찰하면 낫는다”고 주장했다.

안찰과 함께 등장한 방언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방언은 전쟁 시기에 신비 체험을 한 나운몽의 용문산기도원에서 처음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방언이 기도원에서 교회로 확산되는 데 영향을 준 것은 오순절 운동이었다.

이처럼 전쟁 직후 기도원과 사설 예배소, 오순절파 교회를 중심으로 신비체험이 신도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 몇몇 새로운 신앙 집단들이 새로운 형태의 교리와 제의를 내세우며 등장했다. 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와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전도관)가 대표적인 집단이었다.

새로운 종교현상… 통일교와 전도관

전쟁 직후 등장한 기독교계통의 신흥종파를 이해하려면 김백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녀 간의 잘못된 성관계가 타락의 원인’이라고 가르치던 김성도와 백남주가 평북 철산에 설립한 성주교회에 가담한 김백문은 해방 직후 경기도 파주를 근거로 야소교이스라엘수도원을 세웠는데, 초기에 여기로 들어온 사람 가운데 문선명이 있었다.

문선명은 김백문의 문하에서 벗어나 1946년 여름 양에 교회를 개척했고, 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1954년에 통일교를 설립했다. 성적 타락을 죄의 본질로 보는 김성도의 가르침은 김백문의 저술과 야소교이스라엘수도원을 통해 체계화됐고, 문선명은 그것을 ‘원리강론’에서 사용했다.

1955년을 전후로 이렇게 새로운 성서해석을 앞세운 신령파가 기존 모임을 다시 시작하거나 조직을 재정비하고 활동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 집단에 몰려들었다. 박태선과 나운몽이 기존교회 밖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신비체험을 강조한면서도 새로운 성서해석의 체계화에 열중하던 김백문, 문선명보다는 대중적인 부흥집회를 이끌고 있던 나운몽이나 박태선의 집회에 다 많이 몰려갔다.

그런데 박태선과 문선명은 자신을 구원자로 여겼다. 문선명은 예수를 영적 구원만을 성취한 자로 규정하고 자신을‘육적 구원을 성취할 재림주’또는 메시아로 암시했다. 박태선은 자신을‘동방의 의인’또는‘감람나무’로 칭하면서 감람나무가 나타나면 이 세상은 끝이라고 예언했다.

많은 교인들이 신비주의에 빠져들자 1955년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통일교와 전도관을 ‘사이비한 신앙운동’으로 규정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역시 1955년 8월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은 탈선할 우려가 있고 피가름, 악취, 향기 등은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주장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했다. 1960년대 이후 더 다양한 이단적 종파가 등장했는데, 대부분이 전도관과 통일교에 뿌리를 둔 것들이다.

교회와 정치의 관계

해방과 국가 재건 시기부터 남한과 북한 두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은 현실정치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정치활동은 정당을 조직하는 일에서부터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위한 기독교단체의 결성, 정계 투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됐다. 정치활동에 나서지 않고 설교나 글을 통해 정부수립의 기본 이념과 방향을 모색ㆍ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교회는 1950년대 들어서면서 실행된 감옥전도 제도, 군종제도, 국기 주목례 등을 이승만이 기독교적 국가 재건 이념으로 실천한 사례로 받아들였다. 군종제도는 1951년 2월 설립돼 39명의 감리교ㆍ성결교ㆍ장로교 그리고 천주교 군종 장교들이 활동을 시작한 후 1055년 8월까지 그 수가 352명으로 늘었다.

군종제도의 도입으로 군인 가운데 기독교 신자의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54년의 경우 기독교인의 비율이 24%에 달했다. 군종제도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지키는 강력한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정부에도 도움이 되는 제도였다. 감리교는 군종제도의 설치 목적을 두고 ‘전시 국가 업무에 협조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이승만은 집권 이래 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는 1952년 8월에 실시된 제2대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절정에 달했다. 선거를 앞둔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각 교파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을 선임했다. 함께 치러진 부통령 선거에서도 교회는 이승만이 사실상 택정한 장로교 목사 함태영을 지지, 당선시켰다. 휴전회담 반대 기도회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이승만 정부와 교회를 긴밀한 협력 관계로 맺어주는 계기가 됐다면, 1952년 교회의 선거운동은 현실 정치에서 이승만 정부와 교회를 유착시켜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후 맞게 된 1956년 5월 제3대 정ㆍ부통령 선거 때에는 선거에 임하는 교회의 자세에 큰 변화가 있었다.“객관적인 자격을 갖춘 인물에게 투표하라”고 권한다든지 “교역자는 선거에 관여하지 말고 엄정 중립을 지키며 교인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 교회와 이승만 정부의 유착관계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 3월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교회와 이승만 정부 사이의 유착관계는 다시 살아났다. 자유당은 선거가 교회의 발전과 신앙생활의 안정에 중대한 영향을 줄 터이므로 기독교인인 이승만과 이기붕에게 투표할 것을 기독교인들에게 호소했다. 두 후보도‘전국교회 150만 신도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이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를 자행, 학생 시위와 국민 저항에 봉착했다. 이처럼 1950년대 교회의 선거운동을 통해 형성된 교회와 이승만 정부의 유착관계는 결국 양쪽 모두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