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한 탁월한 화가였다.

그렇게 탁월한 그에게도 화가의 정체성마저 위태로웠던 고통의 시기가 있었다. 청춘의 고통과 우울함, 복병처럼 찾아든 가난과 향수병, 미래의 불안으로 1901년부터 1904년까지 캔버스를 온통 어두운 청색으로 물들인 시기가 있었다. 영혼과 캔버스를 어둡고 우울해 보이는 청색으로만 염색했다. 피카소의 격렬했던 청춘의 ‘청색시기’였다.

그러나 피카소는 고통의 청색시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격렬했던 아픔으로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고통의 시기를 무사히 지나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제 세상은 장밋빛으로 변해 버렸다. 자신의 재능에 강한 자신감을 회복한 그의 캔버스는 따뜻한 분홍빛으로 물들여졌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우울한 청색시기를 지난 피카소의 따뜻한 ‘장밋빛 시대’라고 부른다.

요즘 제2의 IMF를 말한다. 경제만이 아니지 않는가? 정치권에도 IMF, 아니 총체적인 난국이라 해야 할 정도 아닌가? 사회 곳곳에 깊은 수렁이 패이기 시작했다. 겨우 한 수렁을 벗어나면 또 다른 거대한 늪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이 수렁을 언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만큼 첩첩산중이다. 우리에게 청색시기가 언제 지나가고 따뜻한 장밋빛 시대가 올 것인가? 기대를 접어버릴 만큼 어둡다.

그러나 기억하라.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절망은 없다. 소망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절망 안에 가두어 두시는 분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절절한 외침을 기억해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 때문인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는 능력의 보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첩첩산중에서 빠져나갈 길을 모르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배로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분명 더 확실한 장밋빛 시대가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다. 절망의 시기에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 분만이 우리의 시대를 ‘장밋빛 시대’로 바꾸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