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그 차를 처음부터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위한 차량으로 구입하였고, 가끔씩 병원에 모시고 가야할 형편을 생각할 때 처분하는 것이 좀 망설여졌다. 여기에 또 다른 불편함이 있었다. 기윤실 운동 초창기 때 소형차 타기 운동... 내가 비록 고물이지만 중형차를 끌고 다니는 것, 그것도 차 두 대씩이나 갖고 있는 것이 옳은가, 아무도 무엇이라 말하지 않지만 기윤실 정신이 주는 불편함으로, 이도 저도 결정 못한 채 있다.

기윤실은 아직도 내게 그런 존재로 남아있다.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생활에 개입해서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오래전 기윤실의 장기(長技)였다. 그러나 그런 ‘불편함’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시대적 열망과 확신을 갖는 조직과 운동의 본질적 특징이니 피해갈 일이 아니었다.

몇 년 전 기윤실의 비전을 새롭게 하는 일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기윤실의 핵심 가치에 대해 새삼 재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검소, 절제, 정직’과 같은 생활 실천 가치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같은 사회 정의적 가치였다. 그 가치를 운동으로 풀어내는 것은 가깝게는 우리 내부 회원들과 교회에게 무수한 긴장과 불편을 주었다. 소형차 타기 같은 운동이 전개되자, 어쩔 수 없이 중형차를 탈 수밖에 없던 회원들은 사무실을 방문할 때 멀찌감치 주차를 하고 오는 그런 ‘외식’을 선택해야했다. 정직과 관련, 한국 교회가 정직의 가치를 살지 못할 때, 기윤실은 교회의 수준을 인정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큰 가치와 규범, 아니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표준적 가치로 교회를 이끌려 했다. 그래서 거친 항의도 받고 도전도 받았다.

기윤실 20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내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은 교회세습반대운동 때였다. 세습을 진행 중인 어느 큰 대형 교회 앞에서 검은 프래카드를 들고 침묵으로 시위하며 울던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이 새롭다. 그때 그 현장에서 나는 내가 기윤실의 회원이라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교회와 시대의 모순 한 복판에서 결코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고 그 시대의 아픔을 몸으로 받아내는 일은, 홀로 기도를 하는 힘이었고, 말씀을 듣는 의욕이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교회를 불편하게 만드는 기윤실의 그 정신이 너무도 소중했다.

그러나 웬지 요즘은 기윤실로부터 그런 불편함을 만나지 못해 서운하다. 내 삶의 연약한 부분, 대충 넘어가려 하는 부분을 비수같이 비집고 들어와서 고발하며, 시대와 교회의 모순 핵심에 서서 불편을 감수할 것인가를 회원들에게 요구하는 그 ‘거친 운동’이 그립다.

기윤실은 사명을 다한 조직인가. 우리 사회는 충분히 정직하여 더 이상 기윤실이 활동을 멈추어도 될 정도가 되었는가. 시민들에서 시작하여 최고 권력에 이르기까지, ‘정직’이라는 개념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생아’인 것처럼 현실 속에서 무참히 짓밟혀지는 오늘을 우리는 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기윤실은 창립 이래로 가장 뜨겁게, 가장 의욕적으로 일을 할 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 조용하다. 기윤실로 인해 내 삶이 불편해지지 않는다. 명색이 이사인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회원들은 말 할 것이다. “누굴 핑계 대겠소. 이사인 당신 책임 아니겠소?” 유구무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