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서 317-41절                                                                                   경향교회 석기현 담임목사

 유명한 명화 '대부'(The Godfather) 1편에 보면, 주인공 대부 '돈 꼴레오네'의 뒤를 이어 마피아 두목이 된 '마이클 꼴레오네'가 자기네 패밀리의 본거지를 네바다 주의 라스베가스로 옮기면서 카지노 사업에 뛰어들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마이클은 이미 라스베가스의 한 카지노 호텔을 경영하고 있고 또한 자기 아버지와도 친분이 있던 '모 그린'이라는 실력자를 만나서 그의 호텔을 자기에게 매각하라고 제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평생을 바쳐서 이룩해 놓은 카지노 호텔을 넘겨달라는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모 그린은 마이클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립니다.

 그러자 대부 돈 꼴레오네의 둘째 아들이었지만 약한 성격 때문에 마피아 두목 자리를 동생에게 빼앗긴 후에 그 동안 모 그린의 밑에서 일하면서 카지노 사업을 배우고 있던 '프레도'가 당황하면서 "마이클, 네가 이 라스베가스에 와서 모 그린 같은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라고 자기 패밀리의 참모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자기 동생을 질책합니다.

 그때 마이클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자기 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프레도, 당신은 내 형님이고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점잖게 말한 뒤에 곧 이어서 "하지만 누구든지 간에 우리 패밀리에 대항하는 사람을 편드는 행동은 앞으로 다시는 절대로 하지 마세요."(But don't ever take sides with anyone against the family again.)라고 아주 차갑고도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는 '혈육 간의 패밀리'보다는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의리로 맺어진 마피아 패밀리'가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기독신자에게도 그처럼 '육신적 혈통에 따른 가족'보다 더 중요한 가족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한 예수의 피를 받아 한 몸을 이룬 교회 가족'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신약에 있는 그의 서신들을 통해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대로 매우 겸손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17a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라고, 일견 자신을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내세우는 듯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결코 자랑이나 교만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습니다.

 41절은 문맥상 42절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318절부터 21절까지에서 밝히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결론의 말씀인데, 거기서 사도 바울은 "1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신자이니 너희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닮아가려고 노력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 안에서 바로 서 있는 모습을 너희들도 본받아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지극히 친근하고도 정감이 넘치는 호칭으로 부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 된 성도'는 그렇게 '서로 닮아갈 수밖에 없는 영적 가족'임을 강조했던 것이었습니다. 17절 하반절 역시 이런 문맥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하는데, "17b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는 말씀은 '우리처럼 주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을 모범으로 삼고 살고 있는 주위의 교우들을 눈여겨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여기서는 '나를 본받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로 본을 삼고 행하는 자들'이라고 한 것도 그처럼 '주 안에 바로 서 있는 참된 형제들'이 자기 외에도 이미 빌립보교회의 권속들 가운데 많이 생겨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 안에 서 있는 성도'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이제 가정의 달 5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이 지상교회라는 영적 공동체를 통하여 '함께 같은 그리스도의 편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는 예수 가족'의 모습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주 안에 함께 서 있는 성도''땅엣 것'만을 생각하는 자들과는 철저히 성별되어 있는 가족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18절과 19절의 말씀에서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주 안타깝고도 고통스러운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란 교회 밖에서 성도를 핍박하는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앞서 31절부터 16절까지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당시 교회를 어지럽히고 성도들을 미혹하던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안에는 그런 '율법주의자'들과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무리도 있었는데 바로 '무도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교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지만 성경 말씀에 따른 그 어떤 규제도 자신의 생활에 적용시키지 않고 지극히 자유분망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불신자들의 생활과 실제적으로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아예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단정했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입으로는 신앙고백을 했다 하더라도 그 삶에서 신행일치의 모습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고 온통 "땅의 일" '세속적인 것'만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교인이란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분명히 중생 받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멸망'이라는 단어는 '일시적인 파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 '구원의 반대 개념'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이것은 이 빌립보서의 앞에 나오는 128절에서 "멸망의 빙거""구원의 빙거"라는 말을 정반대로 대조시키고 있는 데서도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명색이 교인이라고는 해도 그 머릿속에는 온통 '땅의 일'들뿐이며 그 생활방식도 불신자와 아무 다를 것이 없다면 그 궁극적인 종말 역시 불신자들과 똑같은 '멸망'에 이를 뿐이라는 말입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라는 말은 '그들은 자신의 배를 하나님처럼 모시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 무도덕주의자들의 삶의 구심점은 오로지 자기네의 육욕을 추구하고 충족시키려 하는 이 한 가지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마저도 실제로는 오직 '자신의 육신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면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저희 부끄러움에 있고"라고 번역된 말씀은'자기네의 수치를 자랑거리로 삼고'라고 번역해야 알기 쉽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죄를 부끄러워할 줄 모를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사람 앞에서 자랑스러운 일이나 되는 것처럼 여긴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욕심만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추구하고 성취해 낸 것들이란 사실상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죄에 불과한 것이지만, 교인이라 하면서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들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즉 자나 깨나 모든 사고 하나하나가 다 육체적인 것에만 연연해 있고 그 일거수일투족이 오로지 물질적인 것에만 사로잡혀 끌려 다니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 지상교회 안에는 이런 '가짜 신자', 모든 관심과 목적이 오로지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하는 데에만 뿌리박혀 있는 '가라지 교인'들이 많이 섞여 있음이 현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생각할 때에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은 상당수의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은 했지만 여전히 '세상 일'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신자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결국 나중에 가서는 '구원의 반열'에 들지 못하고 불신자들과 똑같이'멸망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자들이 있음을 목도하고 있던 사도 바울은 그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인하여 이미 "여러 번" 경고해 주었고 "이제도"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시적인 지상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안이한 착각이겠습니까? 그저 '교회라는 간판'만 달고 있으며 '신학적인 차이는 불문에 붙이고 무조건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기독신자라는 명찰'만 붙어 있으면 자동적으로 '다 같은 예수 안의 한 형제로 피차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소리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예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자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 확실한 구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 안의 한 가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십자가 탑을 높이 세우고 있어도 그 교회는 실상 '십자가의 원수'일 뿐이며, 아무리 자기 목에 십자가를 걸고 다녀도 그 사람은 어디까지나 '십자가를 부끄럽게 하는 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오직 내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이다.'라고 알고 있는 교인은 결코 진정한 '예수 가족'이 아니며 '나누어진 형제'들도 결코 아니고, 실상은 여전히 '땅의 일만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원수'일 뿐입니다.'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이 인간 사회를 좀 더 선하고 정의롭게 이끌어가기 위함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교회 역시 절대로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아니며 '교단은 다르지만 같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도 절대로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하는 이단'일 뿐인 것입니다. 지금도 지상교회 안에서는 이처럼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습니다. 비록 현재의 겉모습은 '한 형제자매' 같이 보이지만 그 '마침''멸망'일 뿐인 '이단 교회''가라지 신자'들은 절대로 '같은 예수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 안에 함께 서 있는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가운데 이미 '천국 시민권'을 공유하고 있는 가족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20절과 21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사실 곧 "20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 생각이 '하늘에 있는' 성도는 앞서 보았던 '땅엣 것'만 생각하는 자들과 그 얼마나 '다른' 사람들인지를 뚜렷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진짜 '예수 가족'에 속한 성도는 우선 그 소속감이 전혀 다른데, 바로 20절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밝히고 있는 대로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사용되는 특별한 '강조 용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앞서 19절에서 세 번 나왔던 "저희"라는 말과 아주 정반대로 대조되는 것으로서,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저희의 영광은 자기네의 부끄러움에 있는 자들과 우리는 아예 소속이 다르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한 가족이다.'라고 사도 바울은 아주 힘주어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몸은 비록 아직은 세상에 있을지라도 그 근본적인 소속은 저 하늘나라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시민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는 매우 실감나는 용어였습니다. 빌립보시는 당시 마게도냐에서 크게 번창하고 있던 로마의 식민지 중에 하나로서 그 주민들 대부분이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로마 시민권'이 얼마나 귀중하며 또한 자랑스러운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21절에서도, 사도 바울이 그 빌립보 성에 처음으로 전도하러 갔을 때에 그를 반대했던 자들이 바울을 고발하면서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이 사람이 전한다"라고 무리를 선동했다고 했습니다.

 즉 '로마 시민권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이런 돼먹지 못한 이상한 종교를 전한다.'라고 말할 만큼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빌립보교회 교인들 역시 대부분이 다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아, 우리는 로마 시민권 정도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천국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교인이라 하면서도 '땅엣 것'만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이 하늘나라에 소속된 권속으로서의 놀라운 특권을 생각하면서 그 뿌듯한 자부심과 넘치는 기쁨을 항상 맛보면서 살아가자."라는 권면이었습니다.

 그처럼 '천국 가족'에 확실히 속한 성도들이 누리게 될 특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선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거기로서"라고 직역되어 있는 말은 '거기로부터 오실'이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실 때 약속하신 대로 천국에서 '우리 거할 집'을 예비해 놓으신 후에 다시 우리를 찾아와 주실 재림의 날에 그 그립던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야말로, 장차 '천국시민'만 누리게 될 최고의 특권이요 지금 이 세상에서 참된 성도들이 공유하는 최고의 소망인 것입니다.

 천국이 천국다워지기 위한 최우선의 필수조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소망이 없다면 그 천국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 그토록 좋고 행복한 곳이 되는 이유는 그 곳이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장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주택에 산다고 해도 거기에서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그런 집은 평수가 크면 클수록 더욱 쓸쓸하고 황량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나 왔어요."라고 말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와도 아무 반겨 줄 사람이 없는 집은 사실상 ''이라기보다는 '여관'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아무리 작은 아파트라 해도 자기를 따뜻하게 포옹하면서 맞이해 주는 아내와 반갑게 쪼르르 달려 나오는 아들딸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은 세상의 그 어떤 호화맨션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당에도 만약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려 주고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유리 같은 바다, 열두 진주문, 황금보석 길'이라는 것들이 뭐 그리 좋겠습니까? 그런 정도야 이 세상에서도 고급 아파트나 명품 백화점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천당이 진짜 좋은 이유는 그런 '화려한 외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19:27)라는 감격적인 소망,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7:15)라는 기막힐 행복 때문입니다. 그 하늘나라는 '온갖 좋은 것들로 꾸며져 있기 때문에' 유토피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서 '구원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맞이해 주시고 또한 영원히 함께 살게 해 주실 것인 까닭에 저와 여러분은 천당이 이렇게 마음 설레며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동거하는 가족이 될 성도에게는 또 하나의 특권이 있습니다. 바로 21절에서 "그가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약속하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낮은 몸"이라고 한 것은 이 육신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저질성''저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정말이지 우리의 몸이란 실로 그 얼마나 '낮은 수준'의 것입니까? 걸핏하면 병에 걸리고, 시험에 아주 약하고, 죄를 짓는 데에는 그렇게 잘 끌려가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지금 '입고' 있는 육신이라는 껍데기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낮은 몸'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역시 끝이 없습니다. 감기만 좀 심하게 걸려도 평범한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몸'이며, 마귀가 집중적으로 공략해 오는 목표 역시 대단치도 않은 미혹에 간단히 걸려 실족하게 되는 우리의 '취약한 육체'입니다.

 그처럼 병에 걸려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아파할 수밖에 없을 때마다, 그처럼 시험에 빠져서 스스로도 부끄럽고 또한 한심하기 짝이 없을 때마다, 우리는 '이 육신이 좀 더 강건했으면...', '이 내 몸이 완전무결한 고차원의 존재가 될 수 있다면...'하고 안타까워하게 되지 않습니까? 실로 놀랍게도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바로 예수님 재림의 날이 오면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날에 우리의 '구원주'께서는 우리의 이 '낮은 저질 상태의 몸'을 당신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는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능력)'로써 이 '썩을 몸'이 썩지 않고, '죽을 몸'이 죽지 않는 '성화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양자'로서 이제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게 될 성도들에게는 이 '낮은 몸', '저질 수준의 육체'는 도저히 어울릴 수도 없고 마땅치도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재미'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천당의 영생을 보장해 주는 '시민권'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까닭에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살 동안 내내 '구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가슴이 설레는 행복감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언젠가, 아니 반드시 속히 이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만나서 다시는 '슬픔과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화로운 몸으로 영생하게 될 이 '하늘의 것'을 바라보면서 그날이 올 때까지 이 지상교회를 통하여 '주 안에 든든히 서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논산 훈련소에 들어가서 군사기초훈련을 받던 중 어느 날 휴식 시간이었습니다. 조교가 훈련병 한 명을 불러내어 '노래 일발 장전!'이라고 선창을 하면 나머지 모든 훈련병들이 '발사!'라고 외치고 연이어서 그 앞에 나온 훈련병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이 다 대중가요를 부르기 마련이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집 내 집뿐이리." - 그 동료의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저를 위시한 모든 훈련병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절로 목이 메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푸른 제복을 입은 머슴애'들만 모인 '삭막한 군대 생활'을 시작하던 가운데 그 노래를 듣게 되자, 다들 새삼 '내 집'이 무척 그리워졌던 것이었습니다.

 왜 '나의 집''즐거운 집'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꽃 피고 새 우는' 집이어서가 아니라 그 곳에 바로 '나의 가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있기 때문에 그 곳은 정말 '스위트 홈'(sweet home)이 되는 것이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곳은 'home'이 아니라 그저 '하우스'(house)에 불과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천당 역시 '사랑하는 예수님과 그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성도들'이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 곳은 우리의 '진정한 본향'이요 '행복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천당을 믿지 않는 교인이 어떻게 '한 가족'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늘의 집'을 소망하는 성도만이 진정한 '예수 권속'이며, '땅의 것'만 생각하는 교인은 결국 '지옥 가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외에도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실상은 '그리스도의 원수인 이단'일 뿐이지 절대로 '교회통합운동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형제들'이 아닌 것입니다. 한 가족은 반드시 자기 집으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아버지도 직장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돌아오고, 장을 보러 나갔던 어머니도 집으로 돌아오고, 학교에 갔던 아이들도 파교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군에 입대했던 아들도 휴가를 얻으면 영락없이 집으로 달려오고, 외국에 유학 갔던 자녀들도 학위를 얻고 나면 자기 집으로 금의환향을 합니다.

 그렇게 보고 싶던 부모자녀 형제자매가 다 '자기 집'에 모여서 '한 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가운데 실로 '지상낙원' 같은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있는 한 가족도 이 세상에서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지 간에 언젠가는 결국 다 같은 '하늘의 본향 집'에서 만나게 되고야 맙니다.

 그 집은 그처럼 사랑하고 사모하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곳이며, 모든 성도들이 영화로운 몸을 입고 문자 그대로 '금의환향'하여 모이게 되는 영원한 '스위트 홈'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재림'의 약속을 믿고 이처럼 '천국의 집'에 함께 살게 될 날을 기다리는 '천당 가족'만이 서로를 가리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진정한 '패밀리'입니다. 비록 몸은 세상에 있지만 이처럼 '천국 시민권자'들만 누리게 될 특권적인 축복을 바라보면서 '주 안에 함께 서 있는 성도', 지상교회뿐 아니라 천상교회에까지 영원히 함께 사는 진짜 '예수 가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