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TN방송 추천설교       "여호와 앞에서 자리니라"
  사무엘상 119- 226절                                                                           경향교회 석기현 담임목사 
설교 석기현 목사.jpg  지금은 별로 보이지 않지만
, 제가 어릴 적에 택시를 타면 운전석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어린 사무엘'의 그림을 아주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왜 그런 그림이 나돌게 되었는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물론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기도 생활도 열심히 했겠지만, 성경에서 어린 사무엘이 기도하는 장면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사무엘의 어린 시절 사건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사무엘상 3장에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장면이지 사무엘 쪽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은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사무엘은 어쩌다 보니 '운전하시는 아빠의 안전 운행을 기원하는 자녀'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은 사무엘을 어떤 식으로 상상하고 있든지 간에 그의 유년 시절이 실로 비범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출생부터 시작해서 어릴 때의 성장 과정이 자세히 언급되는 인물로서는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사무엘이 첫 번째일 것입니다. 결국 사무엘은 나중에 '대선지자'가 되었지만 그가 이미 어릴 때부터 그처럼 남다르게 돋보이는 아이가 되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유명한 그의 어머니 한나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한석봉의 어머니가 '불을 끄고 떡을 썰면서' 자기 아들로 하여금 더 열심히 정진하게 한 것이라든지,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 이사를 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좀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애썼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실 훌륭한 아들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한나가 사무엘을 키운 방법과 과정은 그런 정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남다른 '모자(母子) 관계'만을 통한 교육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제3'를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개입을 시킨 아주 특이한 방법의 교육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이 사무엘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자녀들을 과연 어떻게 '여호와 앞에서' 키워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모는 자기 자녀를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119절과 20절의 말씀에 "19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0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라고 기록했습니다.

한나가 그 간절한 서원 기도를 드린 후 드디어 사무엘을 얻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 간구하다' 혹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사무엘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 아들을 얻은 첫 순간부터 잊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엘가나와 결혼하고 오랫동안 부부로 지냈지만 아이를 갖지는 못했습니다. 16절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녀는 무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녀는 이로 인하여 실로 큰 마음고생을 겪었습니다. 특히 당시 사회에서는 결혼한 여자가 자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수치'로 여겨지고 있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해" 주심으로써 사무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냥 아들딸을 낳게 되어도 부모로서는 황홀할 정도로 기쁜 일인데 하물며 그토록 오래 기다리다가 얻게 되었으니 한나의 행복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까닭에 한나에게 있어서는 자식이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셔서 얻게 된 최고의 선물'이라는 사실이 더욱 뚜렷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한나는 자기 아들 사무엘을 낳게 된 첫 순간부터 그 아들을 단순히 '모자(母子) 관계'에서만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았던 것이었고,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부터 '하나님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다'는 의미로 '사무엘'이라고 지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자식을 얻게 되는 것을 두고 그저 무슨 생물학적인 종족번성의 본능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자녀가 그렇게 '특별할'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뜻하지 않았는데 '실수'로 생긴 아이라고 여겨서도 절대로 아니 됩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자녀는 그렇게 '귀중한' 아이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그저 부부 생활의 당연한 결과라고만 생각해서도 아니 됩니다.

아무리 부부가 다 건강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잉태시켜 주지 않으시면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영혼을 창조해 주시고 그 육신을 조성해 주셨습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그 아이의 존재를 계획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아서 그의 이름을 짓기 훨씬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구원받을 자로 '선택'해 놓으시고 '생명책'에 기록까지 해 놓으신 가운데, 때가 되었을 때에 부모를 통해 이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로 우리 자녀들의 진짜 아버지는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자녀들은 우리가 부모로서 얻게 된 '최고로 특별하고 소중한 선물이요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자신부터도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셨기 때문에 비로소 '아버지''어머니'라는 이름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273절에서도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은 문자 그대로 "기업"이요 "상급"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가장 귀중한 재산인 동시에 가장 특별한 상' 그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의 아들딸들은 '내가 낳은 내 자식'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해 주심'으로써 얻게 된 생명임을 깨닫고 이 생애 최고의 선물을 누리게 된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 것을 진정 감사드리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의 생애를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218절 이하 21절에 "18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19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20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그 집으로 돌아가매 21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태어나게 되자 자기가 옛날 무자(無子)했을 때에 하나님께 서원했던 그대로 사무엘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렸고", 그래서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여호와께 경배"하며 "여호와 앞에 섬기는" 가운데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즉 그녀는 사무엘이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성소에 가서 엘리 제사장의 밑에서 자라도록 했던 것이었습니다.

'젖을 뗀'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은 물론 오늘날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며 정확한 시점을 알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매우 어린 시절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나에게 있어서 인간적으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정말 얼마나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습니까? 특히 한나는 옛날 자기가 아직 자식이 없을 때에 자기를 그토록 괴롭히던 시앗 브닌나 앞에서 이제 매일 보란 듯이 그 아들 사무엘을 과시하면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늘 자기 품에 두고 이제부터는 '아들 가진 재미'를 톡톡히 맛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는 사무엘을 자기 욕심대로 키우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그녀는 원래 아들을 달라고 서원 기도할 때부터 이미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녀는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아들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아들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할 때부터 나중에 그 귀한 아들을 오히려 여호와께 온전히 드리는 즐거움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서원을 사무엘을 얻은 후에도 잊지 않고 지킨 한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아예 "세 아들과 두 딸"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이 사무엘""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아주 특권적인 교육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녀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이 다 '목사가 되게 해야 한다' 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딸만 가진 부모는 그들을 하나님께 바칠 의무에서 자동적으로 '열외'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하지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아들딸이라고 해서 그들을 '자기 소유'처럼 키우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속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키우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신앙의 인물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못난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바로 자기 인생에 못 이룬 한을 자식을 통해 풀어 보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자식을 키우는 부모입니다. 자기가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어찌하든지 자기 자식만은 일류 대학에 보내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학교 다닐 때에 지지리도 공부하지 않고 밑바닥 성적표를 받아 왔던 것은 조금도 기억도 하지 않고, 자기 자녀들에게는 하루 종일 공부만 하라고 잔소리를 하고 아예 주일예배까지 빼먹고 학원에 가게 하는 유치한 부모들이 정말 수두룩합니다.

그런가 하면 '내 노후까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으니 어찌하든지 네 앞가림만 스스로 잘하고 너만 행복하게 살아라.'고 가르치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자식에게 짐이 되지는 않겠다는, 상당히 개화된 부모의 말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자기 자녀를 철저한 이기주의자로만 키우고 있는 부모들입니다. 그렇게 자란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할 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도 섬길 줄 모르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조차 봉양할 줄 모르니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아버지'를 섬기기는커녕 어디 생각이라도 하겠습니까? 부모에게는 자기 자녀의 전 인생이 반드시 '하나님께 속하도록'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녀를 부모의 '대리만족'의 수단이나 부모의 '노후보장책'으로 여겨서도 안 되지만, 또한 그들의 인생이 그저 그들 자신만의 것이 되게 해서도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이니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하나님 식의 교육'을 받도록 하고 당연히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키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간단히 한마디로 하자면 바로 '교회중심'의 교육입니다.

고대 스파르타의 어떤 어머니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녀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 모두가 다 스파르타의 전사(戰士)가 되어서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집의 한 노예를 전쟁터로 보내어 소식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그가 돌아와서 그녀의 다섯 아들이 다 전사했다고 알려 주자 그녀는 "내가 언제 그런 것을 물었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노예가 그제야 눈치를 채고 "스파르타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라고 전해 주자 그 어머니는 자기의 다섯 아들들을 조국을 위해 바치게 된 것을 감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신앙의 부모들이야말로 자신의 자녀들이 교회를 통해 교육을 받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게 되는 것을 진정 부모로서의 최고 영예로 여길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식은 두말할 것 없이 부모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그 소중한 자녀들을 '여호와께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자라나며, 평생토록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이가 되게 해야 합니다. 222절 이하 26절 말씀에 "22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25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26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고 기록했습니다.

한나로부터 어린 사무엘을 받아 대신 키우게 된 사람은 엘리 제사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친아들 '홉니''비느하스'는 온갖 "악행"으로써 "온 이스라엘" 앞에 악명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비록 엘리 제사장이 그들을 불러 훈계를 하기는 했지만 그 강도가 너무나 약하며 또한 아무 권위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할 정도로 이미 다 자란 아들들이니 늙은 아버지의 말이 귀에 들어갈 리가 없었던 것이며, 그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엘리 제사장이 그 아들들을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시키지 않았던 데에 있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이 얼마나 악했는지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예 "죽이기로 뜻하실" 정도였습니다. 명색이 '대제사장의 아들'이며 본인들 또한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처럼 사람 앞에서도 악명 높고 하나님께로부터도 미움을 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무엘은 그들과는 정반대로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는" 중에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은총을 받다'라는 말은'사랑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담뿍 사랑을 받는 아이가 되어 있었고, 그런 까닭에 사람에게서도 역시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아이로 자라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더욱"이라는 수식어는 어린 사무엘이 그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받는 사랑이 그가 점점 더 성장하는 것과 정비례하여 증가하고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매일 '여호와 앞에서 자라는' 아이였으니 날이 갈수록 '더 큰 은총을 입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었겠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그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아이'가 되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난리들을 치고 있습니까? 딸아이가 겨우 걸음마를 배우고 나면 그 때부터 벌써 온갖 '미인 대회'에 내보내면서 키우는 어머니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자기 자녀를 학교 선생님에게 잘 보이게 하려고 설치는 바람에 '치맛바람'이란 단어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언젠가 '화성인'이라는 오락프로에 보니까, 자기 딸을 반드시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게 하겠다고 굳은 작정을 하고 성형수술부터 시작해서 온갖 투자(?)를 하는, 정말 별난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어찌하든지 자기 자녀를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에게 인기 있는, 사람의 흠모를 한 몸에 모으는 아이로만 키우려 하는 부모의 열성은 그저 '도가 지나친' 정도가 아니라 이미 '이 지구의 정상인'이 아닌 수준으로 자타가 공인할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신자라 하면서도 이런 세상 불신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눈을 가진 부모가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스러워 하실 이유와 조건들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하고 오로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조건만 따지면서 자녀를 키우는 그런 한심한 부모가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적어도 믿는 부모라면 자기 자녀를 먼저 '여호와께 은총 받는' 아이로 키울 줄 알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부모라면 자기 자녀가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아이가 되게 해야겠다는 바람이 간절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이로 만들면 그 자녀가 사람에게서 사랑받는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사람에게 사랑받는 아이로 먼저 만들려고 하면, 설사 그것은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자녀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이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니 그런 아이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을 바랄 줄도 모르는 가운데 자라고, 결국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 줄을 평생토록 체험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자녀를 보실 때 과연 얼마나 사랑스러우실까?'우리 부모들은 바로 이런 질문을 해 보면서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내 아들, 내 딸에게서 무슨 귀여운 구석, 어떤 예쁜 모습이 있을까?' 자녀를 위하여 정말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신경을 쓰고 정성을 쏟을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경외할 줄 아는 아이, 예수님 사랑을 말할 줄 아는 아이,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배우는 아이, 찬송을 즐겁게 부르고 때마다 기도를 잊지 않는 아이, 주일성수는 아주 당연한 일로 알고 헌금생활부터 벌써 습관이 된 아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습니까?

아이를 '자기가 사랑하는 만큼만' 키우고 있는 부모는 그 자녀에게 "아빠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말만 해 주면 다 된 줄로 알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부모는 "예수님께서 너를 사랑해 주고 계신단다."라고 자기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아침저녁으로 일깨워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를 그저 부모의 사랑 밑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만 사랑 받게 되는 아이로 키우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로서 그 전 인생이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통하여 구원과 축복을 누리게 되는, 실로 '여호와의 은총을 받는' 아들딸로 키우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어릴 때 외할머니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외할머니와의 관계는 저로 하여금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는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특별하고도 소중한 것들을 많이 얻게 해 주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물론 부모에게서 대부분의 교육을 받게 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가까이 지내게 되면 더 풍성하고 깊은 것들을 절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여호와 앞에서 자라는' 아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부모만 잘해 주면, 부모만 사랑해 주면, 부모에게만 감사하고 효성을 할 줄 알도록 자식을 키우면 다 된다고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기 자녀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아이'로 키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 자녀가 지금 '부모 앞에서'만 자라는 '치마폭 속의 아이'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신전인격자'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아이는 '내 아들', '내 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아이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죽도록 고생하면서 이 애 키운 내게만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저 내 눈에만 예쁘게 보이는 딸로, 그저 다른 사람 눈에만 부러워할 만한 아들로 키우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자녀는 틀림없이 지금 '부모 앞에서만' 자라고 있는 아이입니다. "네 아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 자기 자식만 알았던 못난 아비 엘리를 하나님께서 책망하셨던 말씀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 하나님을 먼저 경외하고 높이면서 자녀를 교육하지 못하고 오직 자식만을 받들어 모시듯이 키우다가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는 꼴이 되었던 아버지 엘리는 끝내 자기 자신과 자기의 두 아들들을 함께 망치고 말았습니다.

자기 자녀를 그저 부모의 손 안에서, 부모의 머리 안에서, 부모 욕심 안에서 키우면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가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자라는 아이로 키워야만 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특별한 아이', '여호와께 바쳐진 소중한 아이', '여호와께 먼저 사랑을 받음으로써 사람에게도 사랑을 받는 아이' - 우리의 자녀들을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인격자'로 키우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