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통하여 나타나는 결과

 사 5:1~10
 기름진 산. 땅 파고 돌 제거함.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음. 망대 세움. 술틀마련- 즉 최고의 환경과 보살핌이 있었다. 그러나 들 포도송이가 열렸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자유롭게 믿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에 살고 있으며 예수를 믿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다 제거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돕는 수많은 자료들이 즐비해 있다.
 
 
기독교 관련사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을 만큼 손을 뻗으면 곳곳에 언제든지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말씀이 극상품이 되어 좋은 설교가 쏟아져 나온다. 망대 역할을 하는 기관도 많고 기도원도 많다. 그리고 술틀에 해당되는 부서도 많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들 포도를 맺고 있지는 않는가? 건강이 있으면 건강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물질이 있으면 물질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지식이 있으면 지식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은혜를 받고도 거기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 안 된다. 망대가 허물어지고 죽게 된다.

  열매 맺는 무화과나무
 성경: 13:6-9

 본문 말씀 앞부분에서는 다분히 회개하지 않을 때 내려지는 심판이 강조된 반면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비유에는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동안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말씀이다. 6절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포도나(80:8-11;5:2) 무화과나무(24:3:9:10)로 비유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를 심은 사람은 하나님을 비유하며 열매는 이스라엘 백성의 참된 회개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 포도원에는 여러 종류의 과실수들이 함께 심어졌다(왕하18:31;4:4).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가 주인의 기대에 어긋나게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노력)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7절 여기서 과원 지기는 예수라고 보아야 하며 이 과원지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이에 주인은 그 열매 없는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면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과실수(果實樹)가 과실을 맺지 못하므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상실 했으며,다른 하나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땅만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쓸모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는 명령은 당연한 것이었다. 여기서 '찍어버림'은 그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의 징벌의 수준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을 뜻한다고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 가해지는 심판의 최후 성을 말해주는 것이다(3:10,7:19,21:18-20). 8절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것은 마치 멸망 받아야 할 소돔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렸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으로(18:22-32) 예수가 지니고 있는 신적인 인내와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다.'두루 파고'에서 '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캐토'는 뿌리 주변에 있는 흙을 부드럽게 해주는 것이다. 거름까지 주는 이러한 배려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기간이 3년이나 지나도록 전혀 과실을 맺지 못하는 나무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형편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정성을 쏟음으로써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궁극적 관심은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보여준다(23:34). 9"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는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기 위하여 문장을 완결 짓지 않고 중간에 끝맺는 표현이다.

  과원지기는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상태에 달린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매를 맺는 기간을 연장해 주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여건까지 배려해줌으로써,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느냐 안 맺느냐의 결정은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할 수 있도록 유보(留保)해 둔 심판까지의 기한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열매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①빛의 열매(5:9) 선한 열매(3:17) 손의 열매(31:31) 영생의 열매(4:36,6:22) 의의 열매(6:12,고후9:10,1:11,12:11,3:18) 의인의 열매(11:30) 하나님 나라의 열매(21:43) 입의 열매(13:2,18:20,21,57:19,13:15) 성령의 열매(5:22-24)

  본문을 통하여 본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옥토 밭이 되어야 한다. 포도원은 기름진 땅으로 그곳에 심은 나무는 열매를 잘 맺게 되어있다. 옥토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마13장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포도원에 심기어진 무화과나무는 무한정 그곳에 있을 수는 없다. 제한적인 시간이다. 무슨 나무든 다 그러하겠지만 이러한 형편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은혜 받을 가치 없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좋은 열매를 얻고자 함이며, 이러한 시간은 제한적이며, 은혜가 무한정으로 임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남들처럼 이리저리 비판하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자기 발에 도끼가 놓여 있는데 한눈 팔 여유가 없다. 예수님이 본문의 비유를 하신 것은 곧 그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그들에게는 금년이라는 시간적 제한이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도 낭비해서는 안 되며, 물질도 그러하며, 은혜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곧 심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자라야 한다. 누가 어떻게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며 키우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좋은 열매 맺도록 키우시는 분이매 그분께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하자. 그분의 테두리를 벗어난 양은 위태로울 뿐이며 그분에게서 떠난 가지는 말라져 밖에 버리울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목자로, 아버지로, 스승으로 삼고 그분의 인도를 잘 받들어야 한다.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시련은 뜨거운 결심과 강한 의지가 있어야 이길 수가 있다. 홍해바다라도 가르고 나갈 수 있는 의지, 차가운 어름이라도 녹일 수 있는 의지와 열정, 하늘이라도 뚫을 수 있는 태산과 같은 힘, 마른 땅에서라도 샘물이 솟게 할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갈 뿐이다. 무엇 때문에 사람이 사는가? 우리 모두는 보람된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열매는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이제 모두 강한 의지를 갖고 출발하자.

  잎사귀만이 아닌 열매까지 맺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열매가 맺기 위해서는 잎사귀가 전적으로 필요하다. 많은 생각과 계획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좋은 설계를 해야 좋은 집을 지울 수가 있다. 그러나 생각과 배움과 계획 및 설계로만 끝난다면 아니함과 다름이 없다. 잎사귀가 풍성하다면 의례히 열매까지 맺을 수가 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로서 당연히 열매가 열려야만 하고 열매를 구하는 주님의 행위도 당연한 것이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거름이 필요하다.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교훈을 철저히 인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열매가 설령 열릴지라도 먹지 못하는 모양만 있는 열매일 뿐이다. 거름이 풍부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 물고기도 새끼를 낳으려면 맛있는 지렁이를 먹어야 한다는데 좋은 신자로서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말씀을 읽고 듣고 보는 일에 한걸음 더 나아가 지키는 일에 힘쓰자.

  21:28-19에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곧 말라버렸는데 예수님은 왜 열매를 찾으려고 하셨는가? 시장하셔서 잡수시기 위해서 이였다. 육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작은 열매하나 드리지 못한 무화과나무라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서 열매를 얻고자 하신 예수님은 결코 아니다.

  충분히 열매를 맺을 수가 있었기에 얻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시장하셨을 때에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는가? 예수님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나를 위해 기도하라'(14:34)고 하였을 때 누가 예수님을 위하여 기도를 하였는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지셨을 때에 누가 대신 십자가를 지어 주었는가? 시장하신예수님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며 시장기를 면케 한 사람이 있었던가.

 떡과 고기로 자기 배를 먼저 채우려고 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가 있는가? 매일 매일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하나님께 희생의 제물을 드린 적이 없지 않는가? 요셉과 함께 있었던 떡 맡은 관원장은 그의 꿈속에서 바로를 위하여 구운 각종 식물이 담긴 흰떡 3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데 새들이 그것을 먹어 버렸으나, 술 맡은 관원장은 손에 있는 바로의 잔에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담아 바로의 손에 드렸다고 하였다.

  술 맡은 관원장의 술은 왕의 손에 드리워진 반면 떡 맡은 관원장의 떡은 새들에게 뺏겨 왕에게까지 가지 못함으로 그는 3일 후에 목 베임을 당하여 죽고 말았다. 여러분!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고 하심은 예수님이 잡수시고자 함이 아닌 그것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범위에서 벗어나서 남을 생각하는 신앙으로 발전하십시다.

  에스더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3일을 금식한 후에 왕 앞에 나갔을 때에 그의 민족을 구원할 수가 있었다. 룻도 자기의 입에 먼저 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늙은 시모를 위해 곡식을 주울 때에 하나님의 은총이 그녀에게 임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의 입속에 먼저 넣기 전에 하나님의 입을 생각하였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아니했을 것이다.

  여러분! 지혜로운 야곱은 팥죽을 쑤어 놓고 형을 기다리다가 팥죽 한 그릇을 형에게 주는 조건으로 장자권을 달라고 했다. 먼저 장자권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사단도 마4:8-10에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다 보여 준 후에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네게 주리라고 하였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 먼저 시장하여 열매를 찾을 때에, 열매를 우리에게 달라고 하실 때에 그냥 달라고 하실 리가 있겠는가?

  냉정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하자. 시장하신 예수님이 열매를 달라고 하심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우리도 그 정도 하나 못 드릴 형편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열매 하나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주를 위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나라고 하는 주관에서 벗어나 남을 생각하고 아니 그보다 주님을 먼저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추측이라도 해 보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CJTNTV방송 지저스타임즈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