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TN방송 추천설교      "산자의 하나님이시라"

 마가복음 1218-27절                                                                                                 석기현 담임목사

 솔제니친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은 구소련 시절에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슈호프라는 한 죄수의 하루 일과를 묘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 소설에 보면 슈호프와 같은 막사에서 나란히 침상을 쓰고 있는 알료시카라는 침례교도가 등장하는데, 아주 독실한 기독신자인 그는 기회만 있으면 슈호프를 전도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알료시카의 집요한 전도에 질리게 된 슈호프가 이렇게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보게, 나도 하나님을 믿고는 싶어. 하지만 나는 자네들이 왜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을 주장하는지 알 수가 없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저자인 솔제니친이 자신의 작품 속의 인물인 슈호프의 입을 빌려서 본인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사실 솔제니친을 위시한 오늘날의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저 '막연하고 추상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죽은 사람의 부활과 내세의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재고의 가치조차 없는 '케케묵은 구세대 종교의 산물'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솔제니친은 아마도 자신이 실제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8년이나 수감되어 있던 동안에 '알료시카'와 같이 내세를 확실히 믿는 독실한 기독신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던 까닭에 그의 소설에 등장시켰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알료시카'와 마찬가지로 모든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부활과 영생'의 실존을 믿는 것은 그야말로 '신앙 제1'나 다름없습니다.

  비록 나름대로 예수님을 따르고 성경에 기록된 다른 교훈들을 지키면서 산다 하더라도 만약 이 부활 교리를 믿지 못한다면,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강조했던 그대로 "우리의 믿음은 헛 것"이 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은 예수님을 똑바로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믿어야 할 필수적 신앙이지 결코 선택사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는 것이겠습니까?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부활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 근대에 들어와서 과학과 문명이 발달됨으로써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더 똑똑해진 까닭에 나타나게 된 현상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부활을 의심하지 못할 만큼 머리가 모자랐고 반면에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육체적 부활을 의심할만한 지식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미 예수님 시대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늘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처럼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던 당대의 지식인'들이 담대하게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네의 논리를 가지고 예수님과 정면 대결을 시도했던 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저와 여러분은 사람으로 하여금 부활을 불신앙하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이며 반면에 부활을 믿을 수 있게 해 주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현실 만족''인간의 이성'에만 사로잡힌 사람은 부활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한 불신앙에 빠지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본문 18절에 "18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의 대표적인 종교 집단으로 '바리새파''사두개파'가 있었던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로 늘 함께 언급되곤 하기 때문에 비슷한 사람들로 여겨지기 쉽지만, 사실에 있어서 이 둘은 피차 종교적 입장과 사회적 이해(利害)관계를 전혀 달리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있던 종파들이었습니다.

  주전 150년경에 하스몬 왕가의 요나단 왕이 스스로 대제사장직까지 겸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여기에 반기를 들고 나가 모인 집단이 나중에 '바리새파''에센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사장들과 예루살렘의 지도층 인사들은 그 하스몬 왕가에 동조하여 남아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사두개파가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두개파는 당시 제사장이라는 종교적 최고 지위를 누리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상류사회 계층에 속한 귀족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두개파의 그런 현실적 성향들은 그들의 정치관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으므로 대부분이 다 민족의 독립을 바라고 있었고 또 개중에는 아예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열심당원'이 된 사람들까지 있었지만, 이 사두개인들은 그런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사실상 용납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네들이 누리던 종교적, 사회적 특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그 로마 정권이었고, 만약 유대인들이 독립하게 된다면 그들이 누리고 있던 모든 부와 명예를 다 잃어버릴 위험이 다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옛날 일제 때 우리나라의 친일파와 같은 형편에 있던 자들이 바로 당시의 사두개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그런 안정된 사회적 지위와 보수적 정치관은 그들의 종교관, 즉 신학에도 직결되었습니다. 내세 신앙만큼은 확실히 믿고 있던 바리새인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사두개인들은 현세중심적인 신학을 펼쳐 나갔습니다. 즉 그들 자신의 현재 생활이 너무나 안락하고 편했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따라서 천사나 내세, 부활 이런 모든 것들을 부인하게 되었던 것이었고,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의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의 배경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두개인들과 똑같은 이유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거나 아예 부활의 필요성을 생각조차 해 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자기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있으니 '이보다 더 나은 새 새명'이라는 것에 대한 갈급함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인생이 마치 유토피아처럼 만족스러우니 어찌하든지 그것만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게 되고 그 결과 '부활 후의 내세'라는 것은 오히려 그런 현세의 행복을 빼앗아가 버릴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부활절을 맞이해도, 우리 주님의 부활과 또 주님께서 약속하신 내 몸의 부활을 생각해도 내 영혼이 그다지 흥분되거나 감동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까? 어쩌면 지금 누리고 있는 인생이 너무 편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바쁘다, 피곤하다 어쩌고 불평불만은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지만 사실은 그래도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안락함에 빠져 있으면 자신의 영혼이 부활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느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현실에 대한 만족'은 부활이라는 이 엄청난 축복의 소식을 듣고도 아무 감동도 일으키지 못하게 만드는 '영혼의 수면제'와 같은 것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19절부터 23절에 "19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21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기록했습니다.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차례대로 형수와 결혼하여 가문의 대를 잇게 하는 이 '수혼법'은 비록 율법에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실제적으로는 거의 적용되지 않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두개인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자기들 딴에는 부활의 모순점을 이론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만약 그런 수혼법에 의하여 어쩌다 일곱 형제가 다 한 여자를 아내를 취한 경우가 있다면 부활 후에 도대체 누가 그 여자의 남편이 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만일 부활이 정말 있다면 그런 '해결할 길이 없는 복잡한 딜레마'들이 사후에 수없이 많이 발생할 것이니까 당연히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그네들 딴에는 아무 반증할 여지가 없으리라고 자신만만한 가운데 예수님께 도전했던 것이었습니다.

  일단 사람의 이성과 논리로서 생각할 수 있는 데까지 생각해 보고 그런 후에도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결코 믿을 수 없는 사실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좀 안다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자세입니다. '있다고도 증명되지 않고 없다고도 증명되지 않는 대상은 일단 없다고 본다.'라는 논리는 오늘날에도 무신론자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철칙인 것입니다. 물론 '부활도 있을 것이라고 증명될 수 없으니 일단 없다고 본다.'라는 것이 그들의 대답일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옛날의 사두개인들과 꼭 마찬가지로 소위 현대의 '최고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가장 이성적인 판단'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확실한 결론'이라는 것은 여기에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이겠습니까? 길어야 칠팔십 년 사는 인생들이 자기네들의 제한된 시공 세계의 경험만을 가지고, 전 우주라는 공간과 영원이라는 시간 세계를 마음대로 결론을 짓는 것을 보고 참 얼마나 우스우시겠습니까?

  참으로 시편 기자가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고 표현한 그대로인 것입니다. 애벌레는 고치의 세계밖에 모르지만, 그 밖에는 나비가 날아다닐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에 묻혀 있는 씨앗은 깜깜하고 움직일 수 없는 세계 속에 갇혀 살고 있지만, 일단 싹이 트면 그 밖에는 바람과 비와 햇빛과 어울려 사는 전혀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하리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주의 모사가 되었느뇨"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전지전능의 세계와 사람의 지각과 경험의 세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입니다. '현세에 만족'하고 '얕은 이성이라는 시야에 제한'되어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도 교만한 '오늘날의 사두개인'임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능력''성경'을 깨닫는 사람만이 부활을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부활 신앙'을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24절과 25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24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두개인들이 오해한 이유가 '성경을 몰라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을 두고 "부활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천사와 같이 사는 것이다."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아까 제기했던 질문은 '부활 후의 내세를 마치 이 현세의 연장(延長)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 잘못된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해 생각할 때에 그저 자기네들이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생각했지 사람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실 능력은 깡그리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 후에도 '결혼'을 위시하여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던 모든 생활들이 그대로 좀 더 길게 이어지는 정도로만 생각했지, 정작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활시키실 때는 그들의 모든 생활 양태를 완전히 천사의 세계와 같이 바꾸어 놓으실 수 있을 것이란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그 '하나님의 능력'을 함께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란 이 엄청난 존재를 논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 당연히 소유하시고 발휘하셔야 마땅할 전능에 대해서는 막연히 '사람과 같은 수준'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은 정말 착각치고는 엄청난 착각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름대로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다고 하면 "어찌 그런 일이 정말로 생길 수 있겠나? 구시대의 전설에 불과하다."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신학적인 말은 하면서도 그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하면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어낸 과장이요 거짓말이다."라고 단정해 버리는 사람들이 참 많이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야말로 실상 엄청난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그 분이 어찌 하나님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은 결코 '참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아니면 사람이 만든 우상신' 둘 중에 하나일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수준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활 정도도 행하실 능력이 없으신 분이라면 그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겠습니까?

  이 온 우주의 시공 세계를 주장하고 계신 절대주권자로 우리가 섬겨야 할 하나님께서 만약 사람의 생명 하나 마음대로 못하실 그런 무능력한 하나님이래서야 어떻게 진짜 하나님이 되실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실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는 까닭에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가리켜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 39권 전체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던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모세오경 속에는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예를 들면 다니엘서 122절의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는 말씀과 같이 명백히 사람의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두개인들은 그런 선지서들은 정경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며, 적어도 그들이 믿는 모세오경 속에서만큼은 부활의 ''자도 없다고 확신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오해하고 있다."라고 꾸짖으셨을 때, 그들은 분명히 속으로 '도대체 모세오경의 어느 구석에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는 말인가?'하고 반감을 가졌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그와 같은 속마음을 모르실 리가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그들이 믿지 않는 다른 구약에서 인용하지 않으시고 의도적으로 출애굽기 즉 모세오경 중의 한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해 주셨습니다. 바로 본문 26절과 27절에 "26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6절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로라"라고 모세에게 당신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도대체 어떻게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었겠습니까?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시점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세 사람들이 부활하지 못하고 죽어 없어져 버렸다면 '나는 옛날에 한때 그들의 하나님이었다.'라고 과거의 사건으로만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죽어 버린 사람과 어떤 관계란 것을 유지시킬 수는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다.'라고, 당신과 그 세 사람들과의 관계는 한참 후대의 모세 시절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던 사실로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이미 죽은 신앙의 선조들을 두고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현재형으로 '나는 누구누구의 하나님이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이야말로 부활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증거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 지 몇 백 년이 지난 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을 보면 그들은 결코 죽어 없어지지 않았고 그 영혼은 이미 하나님의 품에 있으며 그들의 육신 역시 장차 부활하여 영생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결코 죽음 속에 내버려 두실 수 없는 분이시며, 그런 까닭에 성도가 죽은 후에도 그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라는 말씀 속에 확실히 증거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멋진 성경 해석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모세 오경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박식하다고 자타공인하고 있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바로 그 모세 오경 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는 말씀 앞에 큰 충격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233절에 보면 함께 있던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고 했습니다. 즉 사두개인이나 무리들이나 예수님의 이 오묘한 말씀 해석 앞에 그야말로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의 다른 것들은 '인생의 좋은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영생 부활'만은 그럴 수 없다는 사람들은 우리 예수님의 이 증거 앞에 정말 겸손히 자기 심령을 돌이켜 보고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사람에게 주어진 '부활에 대한 최고 최선의 증거'임을 예수님께서 너무나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 다른 증거를 찾거나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다른 아무 증거물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직 성경 말씀 한 절만 가지고 부활의 진실성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더 이상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으셨던 성경 말씀, 예수님께서 부활의 증거로서 유일하게 내세우셨던 성경 말씀, 예수님께서 오늘도 당신의 택자들의 심령에 성령을 통하여 믿도록 역사해 주시는 이 '성경 말씀'만 가지고서 죽은 자를 능히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께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라고 꾸짖으시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라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연히 '부활의 하나님'이심을 이처럼 뚜렷하게 증거해 주고 계십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예수님의 부활을, 또한 나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좀 편안히 잘 산다고 '현세에 만족'하다 보니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조금 배웠다고 하는 그 '알량한 지식'이 자신의 부활신앙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할 줄 모르는 엄청난 모순이 자신의 믿음에 방해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경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무지 때문에 이 귀한 진리를 아직도 영접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서도 "너희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고 부활신앙을 꼭 간직하고 전파할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그 부활을 믿는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과 재결합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 살 동안 우리가 기뻐하며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죽은 후에도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감동해 주시는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을 확실히 믿고 굳게 소망함으로써 이처럼 오로지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