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메시지(6)
                                    이런 때 기도하라(4)
                                  The time when you should pray

 누가복음 18:1-8, 1940, 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은 나치의 공습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공군력은 독일의 공군력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세(劣勢)였습니다. 과연 입수한 정보대로 200대 이상의 나치 폭격기들이 영국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26중대의 비행 중대만이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비행기를 발진(發進)시켰습니다. 그런데, 전광판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나치 비행기들이 방향을 바꾸어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185대의 나치 비행기들이 격추되었고, 나머지 몇 대의 비행기들만 간신히 격추를 면했습니다. 영국 비행기가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추락한 전투기의 나치 조종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영국군 수사관들이 나치 조종사들에게 물었습니다. "단지 2대의 전투기가 우리 측에서 발진했는데 후퇴한 이유가 뭡니까?" "두 대라구요? 두 대가 아니라 수 백대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국군 수사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실제로 나치 비행기를 대항하기 위해서 발진했던 영국 비행기는 단지 몇 대의 낡은 비행기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영국 비행기들이 출격했다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나치 비행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일 저녁 빅벤(Big Ben) 시계가 9시를 알리는 종을 치면 당신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기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어떤 무기로도 당신들의 무기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이 옳았습니다.

영국의 국회의사당 건물 시계탑에 있는 빅벤 시계가 9시를 알리면 강력한 무기가 작동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각이 되면 영국 국민들은 일손을 멈추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그 유명한 <침묵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기도가 이렇게 강력한 무기(武器, weapons)인 것을 믿습니까? 웬만한 그리스도인들은 에베소서 6장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무장(the spiritual armament)에 대하여 잘 압니다. 머리에 구원의 투구를 쓰고, 가슴에는 의()의 흉배(breastplate)를 붙이고, 허리에는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한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성령의 칼, 곧 말씀의 칼을 들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 신발을 신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잘 아는 사람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잘 모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에베소서6:18).”

기도 없는 영적무장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입니다.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기도야말로 진정한 영적무장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죤 낙스(John Knox)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온 민족보다 강하고, 무릎 위에 놓인 나라는 무기 아래 있는 나라보다 강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군인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런 군인을 누가 두려워하겠습니까? 지금 TV에서Fear Factor라고 하는 프로가 인기인 모양입니다. 지난번에는 관속에 사람을 눕혀 놓고 발쪽에는 지렁이를 쏟아 붓고, 머리에는 바퀴벌레를 쏟아 붓고, 가슴 쪽에는 긴 뱀을 쏟아 붓고는 손으로 뱀 중에 흰 뱀 열 마리를 골라서 통 속에 넣는 것입니다. 시간을 재면서 누가 빨리 잡아넣느냐 하는 것입니다.

머리며, 얼굴을 타고 다니는 바퀴벌레도 징그럽지만, 또 발쪽에 옴지락거리는 지렁이도 징그럽지만, 무엇보다 뱀이 무섭습니다. 그런데 출연자들이 뱀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물지 않는 뱀입니다. 뱀이 무서운 것은 뱀이 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뱀의 이빨에 독이 있기 때문에 뱀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물지 않는 뱀이라면 무서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강력한 영적 싸움의 무기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다시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피상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끝까지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 받는다는 그런 식으로 오늘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겠습니까?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오래 기도하라는 뜻이겠습니까? 자식을 키워 본 사람은 압니다. 아이들이 뭐를 사달라고 부모를 조릅니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거절합니다. 그래도 그 아이가 계속 칭얼대고 보채면 할 수 없이 사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제가 아는 하나님은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다가 우리가 계속 졸라댄다고 허락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낙망치 말라는 말은포기하지 말라혹은약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 중의 하나가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목사님, 그렇게 기도해도 안 들어 주시네요.”그래요. 제가 보기에 별로 기도를 많이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사람들은 쉽게 기도해도 안 들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기도할 맛이 나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도 상당히 오래 동안 기도했는데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낙심한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오랫동안 기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 한번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십시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베드로후서3:8). 어떻게 베드로같이 성급한 사람이 이런 말씀을 썼는지 경이(驚異)로운 일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이 하나님의 시간 개념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길다 혹은 짧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완전히 뒤바뀔 수가 있습니다.

잠깐 하루 이틀 기도한 것이라도 하나님은 천년 혹은 이천년 기도한 것으로 간주하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도의 길이나 양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오래 기도했다고 불평할 사람이 있습니까? 얼마나 오래 기도했습니까? 5년 했습니까? 아니면 한10년 했습니까? 제가 하나님의 시간으로 계산해 보니까 5년은 7분이고, 10년은 14분이더라구요. 많이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시기까 우리가 단 10분을 기도해도 한10년 기도한 것으로 보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그렇게 오래 기도했는데도 아무 소용없어!”하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면서 낙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낙심해서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기도하다가 낙심해서 포기해버린 사람들 있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더니만 언제부터 기도 안합니다. 추운 겨울 새벽에도 그렇게 꾸준히 기도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데 계속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에 기도의 응답에 대한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 말씀이 틀렸든지, 아니면 내가 잘못 기도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 말씀이 틀렸다면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틀린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위에 기초를 둔 것 아닙니까? 다행히 기도를 포기한 사람들도 교회는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했던 기도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것들이 무엇이냐 하는 리서치(research) 결과가 나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것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것들 중에 제일 많이 나온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건강, 명예, 가정의 평안, 자녀들의 성공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성공에 대한 생각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똑 같았습니다. 여전히 그리스도인들도 물질적인 축복을 성공으로 생각하고,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을 성공으로 생각하고, 많은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성공으로 생각했습니다.

좀 씁쓸하지만 부정(否定)하기 어렵습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간증들을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들의 사업을 축복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안 팔리던 아파트가 좋은 값에 팔리게 되었는가? 어떻게 망할뻔하던 회사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런 내용들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가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들이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많은 부분들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너희는 그것을 추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마태복음6:33).”이렇게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응당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가장 먼저 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를 놓고 기도하면서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낙심합니다.

이런 눈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끝까지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 것이니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이겠습니까? 저에게는 이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네가 내 뜻을 이루기기 위해 기도하고 있느냐?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네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고 있느냐?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네가 진정 억울한 일을 당했느냐? 세상을 비관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분이 들어주실 것이다.”예수님은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불의한 재판관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재판관은 불의(不義)한 재판관이었습니다. 이 재판관에게 정당한 판결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재판 결과를 뒤집어 놓는 불의한 재판관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재판관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과부는 무력(無力, helpless)한 사람입니다. 아무 힘이 없습니다. 어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부는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이 재판관에게 줄 돈이 없어서 거절당했습니다. 거절당했지만 다른 길이 없었기에 이 과부는 재판관을 또 찾아갔습니다. 또 거절당했지만 또 찾아갔습니다. 이 과부가 끝내 이겼습니다.“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5).”이제 예수님은 이 불의한 재판관을 하나님과 대조(對照, comparison)시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7)?”여러분, 이 말씀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하고 다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재판 결과도 마음대로 조작(操作, manipulation)합니다. 그런 사람인데도 이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이 과부가 정말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믿습니다. 재판장에 가 보세요. 죄다 억울한 사람뿐입니다.

저는 분명히 믿기를 이 과부가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가서 억울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그분은 공의(公義, justice)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판결을 굽게 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원한(怨恨)을 당연히 풀어주십니다. 그러나 비록 그의 자녀들이라고 해도 잘못된 원한은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다시 기도의 문제에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의 잘못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겠습니까?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매우 둔감(鈍感)합니다. 이 말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통찰력(洞察力, insights)이 부족하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깊이,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 삶이 어떤 위기에 빠져 있는지 알지 못하고,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생활의 최대의 관건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알아서 그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행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처럼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기록된 책은 없습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을 읽고 자기 문제에 그 말씀을 적용하는 훈련을 계속하십시오. 단어의 뜻을 모르면 사람들은 사전(事典, dictionary)을 찾습니다. 영어 철자를 잘 몰라도 사전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14-15 말씀입니다.“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조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까? 요점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이미 우리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믿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내 생각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맞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못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되고 싶은 희망 사항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불리할 것 같으면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 속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로마서8:27).”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보다 더 안심이 되는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해 주신다는데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성령께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누군지 작자 미상(未詳)이라고 하는데, 이런 기도문을 썼습니다.“나는 강건함을 구했지만, 주님은 시련을 통해 나를 강하게 만드셨습니다. 나는 지혜를 구했지만, 주님은 나에게 문제를 주셔서 그것을 해결하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번영을 구했지만, 주님은 나에게 일하는데 필요한 힘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용기를 구했지만, 주님은 어려움을 주셔서 그것을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사랑을 구했지만, 주님은 문제 있는 사람들을 보내시어 그들을 돕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호의를 구했지만, 주님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도 얻지 못했지만,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다가 낙심했습니까? 아니면, 분명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어서 낙망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실망하지 마십시오.“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7-8)?”

여러분, 주님이 보시기를 원하는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그렇게 기도했는데로 이루어지지 않아!”“기도해도 아무 소용 없어!”이렇게 말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붙잡고 기도하는 믿음, 그 믿음을 주님께서 보고 싶어 하십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