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세메스를 향해 달려가는 두 어미 소

 삼상 6:7~16“

 지금은 보기가 힘듭니다만 옛날에는 소가 농부에게 있어서 필수적이었다. 논밭을 갈고 각종 짐을 실어 나르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자산이었다. 이사를 갈 때도 소달구지가 필요했다. 비포장 도로를 소달구지에 짐을 실고 먼 장터를 가고 옵니다. 소가 정말 필요했던 농경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소는 죽어서 살과 피를 모두 사람들의 식료로 제공합니다. 가죽과 뼈, 기름도 몽땅 남기지 않고 희생의 제물로 제공합니다. 소란 희생, 봉사, 인내, 무언의 교훈을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도 네 영물의 영상 중에 하나로 소가 기록되어 있다. (4. 7),

  성경에 소에 대해서 기록한 곳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 등장한 벧세메스를 향해 달려가는 암소 두 마리이다. 이 암소 두 마리는 우리에게 더욱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1. 사명을 다하는 어미 소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7)라고 했다. 벧세메스를 향하여 달려가는 두 암소는 사명을 받고 법궤를 운반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막 안 지성소에 있는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아주 소중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운명이 이 법궤에 달려있기도 합니다. 이 법궤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있어서 그들의 생의 중심 목표였다. 법궤의 방향에 따라 그들의 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법궤를 앞세우고 그들은 법궤가 가는 방향을 따라서 40년 위험한 광야 길을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 법궤를 실로에 안치하였다 그런데 사무엘 때에 와서 에벤에셀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과 대전하여 싸우게 되었다. 이때, 이스라엘 장로들이 실로에 안치해 놓은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오고자고 제의를 합니다. 결국 그룹사이에 계신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 법궤를 엘리야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전쟁에서 졌습니다. 그리고 엘리의 두 아들이 함께 죽었다. 이 비보를 전해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 앉은 상태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지고 죽는 참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삼상 4:22절을 보면이가붓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와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전 다곤의 전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자기들이 섬기는 다곤의 신이 산산이 부서져 있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로 보내집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큰 재난이 일어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온몸에 독종이 나서 모두 죽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겼는데 에그론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법궤를 본처로 보내어 자신들의 죽임을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삼상 5:11),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네들 제사장과 복술 자를 부른 다음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만들어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리게 했다. 그리고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한번도 메어보지 못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와 수레에 법궤를 실고 벧세메스로 보내는데 소가 곧장 가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재앙이 우연히 만난 것을 알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암소 두 마리가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본래 법궤는 이스라엘의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양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한다. 그런데 소 수레에 법궤를 실은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오는 소행인 것이다.

  새 수레는 신신학의 모형이다. 블레셋 종교와 여호와의 종교를 혼합한 혼합주의 사상이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인본주의 모형이다. 하나님의 법궤가 가는 방향을 따라서 인간들이 따라가야지 자기의 편리한 대로 자기의 임의대로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기 편리주의는 인본주의의 소행인 것이다. 진리가 없는 형식적 종교는 백성들에게 오히려 재난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인간들의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제사행위는 곧 짐승에게 까지 고통을 주는 요인이 된 동시에 소는 하나님의 법궤를 메는 너무도 귀중한 사명에 쓰임 받게 된 것이다. 밭에서 밭갈이나 하던 소가 하나님의 법궤를 옮길 수 있는 것은 엄청 큰 영광이다. 짐승만도 못한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너무도 큰 영광이요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6:7“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아멘

  2. 젖 먹이는 어린 송아지를 버려두고 벧세메스를 향한 암소

블레셋에 끌려온 두 암소는 수레를 한번도 끌어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두 마리가 다 새끼가 있다는 얘기이다. 법궤를 수레에 실고 가야하기 때문에 새끼와 함께 갈 수 없다. 어미 소를 목메어 불러보아도 젖을 먹여줄 수 없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배고파 어미를 부르는 송아지, 새끼들의 목메인 소리를 듣고도 법궤를 실고 가야만하는 어미 소들, 그 심정은 오직했겠는가? 그렇지만 두 어미 소는 눈물을 흘리면서 벳세메스를 향하여 간 것이다.

  이 장면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무엇을 교훈해 줍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인정. 사정. 애정. 모두 버려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사역에만 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물과 배를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부모님 곁을 떠났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따랐습니다. (4:18~22), 여기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버린 그물은 직업을 말한다. 고기 잡는 도구를 버린 것이다. 생계를 필요로 하는 도구요 그것이 직업이다. 이것을 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버린 배는 생명이다. 배는 어부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걸 버렸습니다. 그리고 부친은 인정을 말하는데 인정을 떠났다는 말이다. 다 버렸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한 제자가 부친이 죽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뢰기를 저의 부친을 장사하고 와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이르시기를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시면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치 아니하다 (9:59~62)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좇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한다(16:24)고 했습니다. 자기의 부모와 자식을 부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주께 합당하지 아니하다(10: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정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공의가 어두워집니다.

  사람의 사정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애정에 빠지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정. 사정. 애정을, 다 버리고 오직 한 길, 주님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는 곧 젖이 먹고 싶어서 배고파 우는 새끼를 버려두고 벧세메스로 달려가는 두 암소와 같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6:12“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아멘

  3. 두 어미 소는 울며 벧세메스 길로 갑니다.

사촌 형님이 옛날에 소 장사를 했습니다. 정목사가 아주 어렸을 때인데 사촌 형님이 지금은 안수집사님이지만, 돈을 커다란 쌀자루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소가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송아지가 어느 정도 크자 어미 소와 이별할 때가 되었다. 어미 소는 자기 새끼가 팔려갈 것을 미리 알았는지 전날 밤은 잠을 안자고 새끼를 혀끝으로 핥아주고 머리로 새끼를 쓰다듬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침이 되어 주인이 자기 새끼를 소 장사에게 보내자 새끼는 어미를 안 떨어지려고 버티며 어미를 음매하고 부릅니다. 어미 소는 그렇게 해서 끌려가는 새끼를 보고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소 장사를 26년 동안 하셨던 분의 경험담을 들었는데, 소가 장터로 팔려갈 때면 대개 3년에서 5년생은 1시간동안 음매 음매 울고, 5년에서 15년생은 머리를 땅에 떨어뜨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어느 날 소 장사가 소 다섯 마리를 사서 장터에 팔았는데 13세 소년이 30리 길을 따라오면서 울었다고 한다. 말 못하는 짐승인들 어찌 새끼에 대한 정이 없겠어요? 젖은 점점 불어나고, 집에서 엄마 잃은 새끼 송아지들이 울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어미 소에게 어찌 눈물이 없겠는가? 무지몽매한 블레셋 방백들의 채찍에 맞아가면서 두 어미 소는 하염없이 울면서 벧세메스를 향하여 갑니다.

  바로 이 벧세메스 길은 다윗 왕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발란으로 인하여 쫓겨나서 맨발로 울면서 올라간 감람산 길이다.(삼하 16:30),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신 기드온 시내 저편 겟세마네 길 (22:44)과 일맥상통하는 길이다.(5:7), 어느 철학자는 말하기를 춥고 눈 오는 밤, 배가 고파서 온 식구가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을 경험 못한 자는 인생도 하나님도 논할 자격도 없다고 하였거니와 나는 이 말을 바꾸어서 춥고 외롭고 눈 오는 밤 찬마루에 홀로 앉아 주님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보지 못한 자는 겟세마네 대속의 주님의 사랑도 천국도 논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

  어느 분은 말하기를 자신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검고, 자식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붉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푸르다고 하였지만, 나는 주님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희다고 말하고 싶다. 은혜의 표백된 눈물은 흰색이다. 무사기한 성결의 미가 있다. 주님이 육체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심한 고통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돌렸고(5:7), 그 눈물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벧세메스 길로 가는 두 어미 소와 같이 뜨거운 많은 눈물이 있어야 한다. 그 길은 눈물 없이는 못가는 길, 피 없이는 못가는 길, 피 없이는 못가는 역경과 고난의 가시 밭 길이었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은 이 눈물의 가시 밭 길을 잘 통과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은 눈물 없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향하여 대로로 가며, 달려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12)라고 했다.

  4. 오직 정로로만 향한 벧세메스의 길이다.

 (1) 정로 목표가 정확해야 합니다.
 이 두 어미 소는 울면서 벧세메스 길로 가는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정로로 행한 것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로로만 행하려면 정확하게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가 없이는 죄우로 치우치게 됩니다. 정로가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 “벧세메스이 말은태양의 궁그런 뜻입니다.

  이는 태양신 샤마슈(Shemesh)의 예배가 행해진 것을 나타내며 몇 개의 성읍이 이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듯이 우리의 태양은 의의 태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예수께서 계신 궁은 하늘 성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늘 성소를 향하여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정로로 달려가야 합니다. 할렐루야!

  (2) 생각이 일치해야 됩니다.
 두 어미 소는 하나님의 법궤를 같이 실고 갈 때, 그 생각은 법궤를 귀중하게 여기는 데 일치한 것입니다. 오른편의 소는 오른쪽으로, 왼편의 소는 왼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두 어미 소는 자기들의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은 가운데 있는 법궤를 중심했기 때문이다. 우산은 가운데 손잡이를 중심으로 할 때 일치를 이루듯이 우리는 내 개인의 취미와 경향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때 일치의 가능성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들은 목적이 하나요, 보조가 하나요, 사명이 하나요, 생각이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로로만 달려갈 수 있었다. 성도들의 일치의 요인은 주님을 중심하는 하나님 제일 신앙으로 결합하는 데 있다. 빌립보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좋은 교회인데 이 교회에 유오디아 집사와 순두게 집사가 생각이 일치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다같이 주님의 마음을 품을 때 진실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4:1~4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아멘. 우리는 서로가 뜻이 다르고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만, 주 안에서만 생각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3) 좌우로 치우치면 안 된다.
고전 15: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견고하고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견고해야 합니다.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양과 염소가 있듯이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주의 신앙이 있는가 하면, 보수주의 신앙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쪽도 저쪽도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한 길, 하나님의 법궤를 중심하는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좌우로 치우칠 위험의 요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지적 면에 치우치면 바리새적인 형식주의 신자가 되기 싶다. 정적 면에 치우치면 광신주의적인 신비주의자가 됩니다. 의지 면에 치우치면 사두개인적인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 . 의를 조화시킨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 그 비결은 중심에 법궤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중심, 하나님 주권,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가지는 데 있다. 두 암소는 자기의 성향을 따라서 좌우로 치우칠 경향이 있었겠지만, 그러나 가운데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기에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좌우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5. 두 어미 소는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본문 14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스러운 법궤를 실고 벧세메스까지 올라온 두 어미 소는 벧세메스에 도달한 다음 제단에 희생 제물로 죽임을 당했다. 눈물로 걸어온 길, 배고파 우는 송아지를 뒤로하고 달려온 벧세메스에서 이제 희생되어 제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애써 끌고 온 수레를 패서 나무로 사용하고, 두 어미 소는 잡아서 번제로 하나님 제단에 드렸다(14), 수레도. 살도. 가죽도. 뼈도. 기름도. 젖을 먹이지 못해서 잔뜩 불어있는 우유까지 몽땅 불태워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봅니까? 나무는 십자가의 상지이요, 번제물은 예수님을 말하고, 소를 잡았던 무리들은 유대인들을 말하고, 블레셋 방백들은 제사장들의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의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우리 예수님을 시기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27:1),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온전히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어 단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7:27),

  우리 성도들도 벧세메스로 올라간 두 암소와 같이 나 자신의 전부를 나를 위하여 죽으신 우리 예수님을 위하여 온전히 희생의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할렐루야!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큰 돌 위에 올려놓은 것 같이(15), 우리는 우리의 전 생명을 우리의 큰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단위에 몽땅 다 내놓아야 합니다.

  벧세메스에 올라간 어미 소가 죽어서 살과 피와 가죽과 기름과 뼈까지 몽땅 번제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재간도, 재물도, 지식도, 생명도,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벧세메스로 올라간 두 암소처럼 우린 주님을 위한 온전한 희생 봉사자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라나타 .......... 오직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