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지 않은 결과

18:12~27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드디어 체포당하십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세 그룹의 사람들이 겟세마네동산에 찾아왔습니다. 첫째는 로마 군인들입니다. 둘째는 유대인들 즉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속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입니다. 그들은 등과 홰와 병기로 무장한 채 예수님을 잡으러 밤에 겟세마네동산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중에 그들이 도착해 제자들과 물리적인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흥분한 베드로가 순간적으로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가 칼을 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열심당원들은 항상 칼을 갖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하속인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결박당하신 예수님

 이제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과 유대인의 하속들에 의해 붙잡혀 결박당하신 채 빌라도 법정으로 가시지 않고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가십니다. 1214절까지 말씀입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당시 대제사장들은 누군가 한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희생해야 유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두 곳에서 재판 받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 재판입니다. 정석대로 한다면 예수님께서 로마 법정으로 끌려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려가셔서 심문을 받고 묶인 채로 가야바의 집 뜰로 끌려가십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종교 재판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면, 예수님께서 붙잡혀 끌려가시면서 고난을 당하시는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가시는 장면은 우리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들은 과연 예수님을 붙잡아 곱게 데리고 갔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튼 로마 군인들과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안나스에게 끌고 갑니다.

  둘째는 법정 재판입니다. 우리는 로마의 법정 재판에서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다고 판결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멀찍이 뒤따르는 베드로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을 충실하게 따라다닌 수제자격인 사람입니다. 그는 정이 많고 혈기 왕성하며 사고형보다 행동형의 사람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엄청나게 큰소리를 쳤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위기가 닥치자 순간적으로 칼을 빼들고 행동으로 옮긴 사람입니다.

 이런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며 헌신적인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신 순간부터 미심쩍은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145152절에서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는 뜻입니다.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오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한 청년, 그 제자가 누구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자신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또 누가복음 2254절에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랐습니다. 즉 예수님께 가까이 가자니 용기가 없고 도망하자니 양심에 찔려서 붙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 따라 간 것입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간 이유는 겁을 냈기 때문입니다. 칼을 빼들어 말고의 귀를 쳤을 만큼 용감했던 베드로가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데, 확실히 믿자니 자신이 없고 교회에 안 다니자니 벌 받을 것 같은 생각에 교회에 오긴 하지만 항상 늦게 와서 일찍 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 행사에 절대 끼어들지 않습니다. 설교만 듣고 그냥 돌아갑니다. 베드로와 같은 성향의 사람입니다.

  중요한 때 기도하지 않은 베드로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의 믿음이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어도 성령 받지 못하고 인간적이고 육적인 믿음을 갖고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이성이나 경험에 근거한 믿음은 한두 번 잘 할 수 있지만, 고난이 오면 곧 피해 버립니다. 그 현상은 봉사 활동을 통해 잘 나타납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누가 뭐라 해도 끝임 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시켜서 합니다. 그러나 칭찬 받기 좋아하고 분위기를 타는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봉사 활동을 합니다.

  둘째는 기도해야 할 때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원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겟세마네동산을 찾으셔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통곡과 눈물은 물론이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다가 제자들을 돌아보면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깨우시면 그들은 또 잠을 잤습니다. 세 번이나 기도하라고 깨우셨지만 제자들은 계속 잠만 잤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과 너무나 대조적인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어떤 위기가 찾아오고 태풍이 몰아쳐도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문젯거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없어질 수도 있고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암에 걸린 사람이 낫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만사형통인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한다면 어떤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기도한다면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 능력과 마음의 강건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찬송가를 부르고 영적 힘을 갖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이것은 절대 불변의 진리입니다.

  기도 없는 충동적인 생각과 행동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베드로는 잠을 잤습니다. 그러다 로마 군인들과 유대인의 하속들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그는 칼을 빼들고 휘두르는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충동적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고 나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충동적인 생각과 행동은 멋져 보이고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항상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은 결과로 충동적 행동을 자행해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었지만,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주시며 베드로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상황에 대비해 기도로 준비하신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장한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찾아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인생에서 봄도 있고 여름도 있으며 가을도 있고 겨울도 있습니다. 인생은 항상 평온하고 온화한 게 아니라 더러 시련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기도로, 믿음으로 준비가 돼 있으면 어떤 시련이라도 넉넉히 이기고 남습니다. 1516절 말씀을 봅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베드로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르다가 대제사장의 집에 이르러 다른 제자만 뜰 안으로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있게 됩니다. 다른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로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과 친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가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해 베드로를 데리고 대제사장의 집 뜰로 데리고 들어옵니다. 평소에 용감하던 베드로가 갑자기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자 문턱 하나 넘지 못합니다. 1718절 말씀을 읽습니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그런데 문지키는 여자가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하나라고 지적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아니라고 첫 번째로 부인합니다. 사람은 한 번 겁을 먹기 시작하면 상대방을 굉장히 크게 보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쩔쩔 매게 됩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문지기 여종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자신의 신앙 고백마저 바꾸게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불안을 현실로 받아들인 베드로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굉장히 좋은 것처럼 보이는 베드로의 믿음이 육신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보통 때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위기 상황에 닥치면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려면 누군가 욕을 해 주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인간적인 것인지 성령님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내밀 것인지 아닌지로 알 수 있습니다.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고, 오리를 같이 가자면 십리를 함께 해 주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창피하게도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육적인 피곤함으로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잤기 때문에 십자가를 감당할 만한 영적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가 상상으로 여기던 불안을 현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때로 우리 인생에 위기가 올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건강을 잃고 직장에서 내몰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다음 직장이 구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갑자기 불안해지면서 불안이 현실을 점점 지배하게 됩니다. 사람이란 원래 좋은 상상보다 최악의 상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상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베드로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1921절 말씀입니다.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베드로가 불안에 사로잡혀서 문지기 여종에게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대제사장 안나스는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가르쳤느냐고 추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당당하시고 자유로운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누구를 공격하지도 않으시고 두려움도 없으십니다. 그것은 기도로 하나님과 충분히 의사소통을 이루셨고 모든 준비를 완벽히 끝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가 뭐라고 해도 전혀 흔들림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은밀히 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친 것을 알고 싶으면 그때 들은 사람들을 불러다가 물어 보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당당한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권력자들은 매사에 당당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때로 머리도 숙이고 손도 비벼야 권력자의 입장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전혀 그러시지 않습니다. 22절 말씀을 봅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 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가 그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태도가 건방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하속이 예수님께 주먹을 날린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전혀 동요하시지 않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권력, 폭력, 돈 앞에 흔들리지 않으시고 어떤 경우에도 교만하시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흔들림이 없고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자꾸 흔들려서 불행한 것입니다. 집이 없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공포와 불안에 떨어서 불행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 더욱 불행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부부 생활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사업을 운영할 때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고난이 해결되었다고 모든 문제들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환난이 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난은 파도와 같은 것입니다. 파도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항상 일렁입니다. 일렁이는 물이 둑을 넘으면 홍수가 나고 사고가 납니다. 다만 우리는 일렁이는 물이 둑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4~25절 말씀입니다.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불을 쬐며 함께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아니라며 두 번째로 부인합니다. 26,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함께 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은 대제사장의 종으로 베드로가 칼을 들어 귀를 베어버린 말고의 일가입니다. 그가 베드로에게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동산에 있던 것을 보았다고 증거를 대자, 베드로는 세 번째로 아니라며 부인합니다. 다른 성경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곧 닭이 웁니다.

  기도하지 않은 결과

 여기서 우리가 교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로써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 어떤 고난이나 슬픔이 와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마저 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순교도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베드로는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한편으로 본인은 얼마나 더 괴로웠겠습니까. 그는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들, 고난이나 핍박이나 위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어진 문제 해결을 위해 망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 줄 아시고 기도로 준비하게 하시며 깊은 교제를 나누길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고난 앞에서도 웃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는 종들에게
안심하는 마음을 주시고
든든한 마음을 주시며 
믿음의 마음을 주옵소서.
세상을 이기고도 남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