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의 주님이 오실 때 일어날 일들
사무엘하 19:11-15
I. 서 론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재앙과 기근 등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는 지진과 헤일 쓰나미 등으로 인한 물난리로 큰 피해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물난리를 가져다 준 엘리뇨 현상, 후에 라니냐라는 또 다른 기상 이변, 엄청난 쓰나미와 같은 재앙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 현상은 이 땅에 또 어떤 재앙을 가져다줄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구의 종말이 온 것이 아닌가'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정말 하늘이 뚫린 것이 비가 내릴 때는 겁이 난다. 하지만 쓰나미나 물난리로 인하여 지구의 종말은 아직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시는 이 땅을 물로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노아와 약속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무지개를 주셨다. 곧 지루한 비가 그치고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무지개가 뜰 날도 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난리가 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우리의 죽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재림의 때를 말씀하시면서"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24:32-33)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는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24:40-43)고 하셨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혹은 우리가 죽을 때에 일어나는 것들을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사무엘하 19장은 구약성경이지만, 이 성경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재림과 그의 재림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지가 나타나 있다. 다윗 왕은 예수님의 모형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예수님의 모형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다윗 왕을 통하여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미리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이 다윗의 아들 중에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겠다고 쿠테타를 일으켰다.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여(삼하15:6) 자기편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 왕을 몰아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왕궁을 버려두고 도망을 갔다. 이것은 마귀 사단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땅은 압살롬이 잠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과 같이 잠시 어둠의 세력들이 다스린다고 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영원히 궁궐에서 쫓겨나고, 압살롬이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다윗 왕은 다시 궁궐로 환궁하였다. 다시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렸다. 우리 예수님도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다시 이 땅에 왕의 왕으로 오신다. 이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오신다. 이렇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아니면 우리가 죽어 예수님 앞으로 갈때 일어날 일들을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II. 본 론
1. 회개와 용서가 일어난다.(삼하19:16-23)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일어나는 사건 중 가장 아름다운 사건은 회개와 용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의 때가 귀하다. 다윗 왕이 다시 예루살렘 궁궐로 환궁하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려고 길갈로 왔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다윗 왕을 영접을 했다.

이 무리들 중에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있었다. 시므이는 다윗 왕이 예루살렘 궁궐에서 쫓겨나 피난을 가다가 바후림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다윗 왕에게 와서 그를 저주했던 자이다.

  (삼하16:5-14) 그는 다윗 왕과 함께 피난 가는 자들을 저주했다. 또한 그들에게 돌을 던졌다. 시므이는 다윗 왕에게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하고 소리 질렀다. 그리고 피난 가는 다윗 왕의 행렬를 따라오며서 산비탈 위에서 저주하고 돌을 던지고 티끌을 날려 먼지를 일으켰다.

그러니 이 시므이가 얼마나 큰 죄를 다윗 왕에게 졌는가? 다윙 왕이 궁궐에 있을 때가 아니고, 피난을 가는 어려울 때 찾아와서 욕을 하고 저주를 했으니, 다윗 왕에게 얼마나 큰 죄를 범했나? 그런데 이 다윗 왕이 다시 왕위에 앉게 되니, 그가 얼마나 큰 화를 당하겠는가? 그는 다시는 용서 받지 못할 죄를 범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이 다윗 왕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하여 길갈에 왔을 때, 이 시므이는 뻔뻔하게도 다윗 왕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다윗 왕에 앞에 엎드려 회개를 한다. "내 주여 원컨데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19:19)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였을까? 왕의 권좌에서 물러났다고 며칠 전에는 그렇게 저주하고 욕하던 그가 이제 다시 권좌에 앉게 되었다고 달려 나와서 용서를 비니, 얼마나 얄밉겠는가? 그리고 그런 야비한 자의 죄를 어떻게 용서하겠는가?

  그러나 다윗 왕은 그의 죄를 너그럽게 다 용서해 주었다. 주위 사람들은 다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다윗 왕은 그의 죄를 다 용서해 주었다. 이것은 인간 다윗이 한 것이 아니다. 인간 다윗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오실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다윗 왕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우리도 재림의 주님이 오시면 다 죽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주님을 배반했는가?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가? 얼마나 교회를 아프게 했는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불충했는가?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고 예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지 않고 얼마나 게을렀던 건가? 우리도 재림의 주님이 오시면 시므이와 같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를 범했다. 그러므로우리도 시므이 같이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밖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던 죄를 회개하자,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에 직접 침을 뱉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교인으로서 행실을 잘 못하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얼굴에 얼마나 많은 침을 뱉게 했는지 모른다. 이런 죄를 회개해야 한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성도들을 헐뜯고, 성도들의 마음에 못을 박았는지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를 헐뜯고,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에 못을 박는 행동이다. 자기 자녀의 마음에 못을 박는 것을 좋아할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모든 죄를 다 회개하여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므이와 같이 죄를 범했어도, 그 범한 죄를 알고 회개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회개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신다. 아무리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다 용서해 주신다. 시므이와 같은 자도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렇게 용서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림의 때를 기다리며,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maranata)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은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던 모든 죄짐이 재림의 주님이 오시면 다 벗어지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용서를 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용서의 사랑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우리는 이 기독교의 핵심을 바로 알아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조수가 부주의하여 중요한 시기에 페인트 몇 방울을 흘렸다. 그 유명한 화가는 진노하여 젊은 조수에게 심한 말을 마구 하였다. 그는 울적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버렸다. 다빈치는 혼자 쓸쓸히 그림을 계속하려고 붓을 들어 예수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런데 갑자기 손이 얼어붙었다. 창조의 힘이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그의 창조력을 봉쇄시키고 말았다. 결국 그는 붓을 집어 던지고 밖으로 나가서 울고 있는 그 소년을 찾았다. 그는 소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사과하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하마. 다시 돌아가자. 나도 너도 모두 잘못을 저지른 거야. 사실 화를 낸 내가 페인트 몇 방울 떨어뜨린 너보다 더 큰 잘못을 범한 것이지."소년은 다빈치를 따라 다시 돌아왔다. 다빈치가 붓을 잡고 그림 앞에 앉자 다시 창조력이 생겨나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예기이다.

그 예수님의 얼굴은 그날 이후로 수백만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렇게 예수님의 얼굴은 오직 용서가 있어야만 완성이 됩니다. 용서를 뺀 예수님의 얼굴은 온전한 얼굴이 아니다. 재림의 주님이 오실 때에도 이 용서의 얼굴로 오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실 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용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예수님을 믿는 참다운 교회이다.

19401114일 독일의 공군인 루프트바페(Luftwaffe)가 영국의 커벤트리(Coventry)시를 폭격을 했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동안에 있었던 영국에 대한 가장 긴 공습이었다. 공습이 끝나자 주민들은 나와서 폐허가 된 도시를 살펴보았다. 그때 그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성전까지 완전히 파괴한 것을 보자 그들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끌어 올랐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비록 폭격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을 분노와 원수 맺는 구실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날 그들은 성전에 쓰였던 부러지고, 까맣게 그을린 두개의 들보를 성전 지붕에서 떼어냈다.

  그리고는 그 두개를 서로 연결해서 십자가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제단이 있던 폐허가 된 성전 터의 맨 동쪽에 세웠다. 그리고는 교회의 이름을 써놓았던 간판에 두개의 글자를 썼다. 그리고는 그 십자가 밑데 두었다. 그들이 쓴 두 글자는 "아버지여, 용서 하소서"(Father Forgive)였다.

  성전은 용서의 장소이다. 용서의 예수님이 계신교회를 다니면서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잘 못을 범한 모든 자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신 주님을 본받아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2. 공정한 심판이 있다.
악을 보고도 처벌하지 않으면, 그것은 악을 행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이 땅에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고도 심판하시지 않으면 그 하나님은 악을 조장하는 악한 하나님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을 하신다. 재림의 주님이 오실 때에도, 그 재림의 주님은 이 땅을 심판하신다. 공정하게, 아주 분명하게 심판을 하신다. 죄인들을 공정하게 심판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든든할 수 없다.

영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훌륭한 통치자는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공정한 심판을 해야 한다. 의인척하는 악인을 분별하여 처벌 할 수 있어야 한다. 사기꾼들을 분명하게 가려내서 심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못하면 그는 똑같은 의인척하는 악인이거나 사기꾼에 불과하다. 그래서 재림의 주님이 오시면, 주님의 나라를 튼튼하고, 영원하게 하기 위하여 공정한 심판을 하신다. 분명한 심판을 하신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의 집안이 몰락했을 때, 왕위에 오른 다윗 왕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의 우정을 생각해서 사울 집에 은혜를 베풀기로 했다. 그래서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나 사울의 집은 완전히 다 몰락하고 오직 요나단의 아들 중에 절뚝발이 므비보셋만이 남았다. 그래서 다윗 왕은 사울 왕의 모든 재산을 다 므비보셋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그가 절뚝발이라 재산을 관리할 수 없어서 그의 종 시바에게 관리하고 하였다.

  그런데 다윗 왕이 궁궐에서 쫓겨나자, 므비보셋도 함께 따라 가려고 했다. 또한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그는 절뚝발이라 따라 갈 수가 없다. 그래서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가야했다. 그런데 그의 종 시바가 그를 속이고 나귀를 없애 버렸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궁궐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시바는 다윗 왕이 도망을 갈 때,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므비보셋이 타야 할 그 나귀에 떡 200과 건포도 100송이와 여름실과 100과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에게 왔다. 그리고는 그것을 도망가는 다윗에게 드렸다. 갑자기 도망을 가느라고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다윗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자 다윗은 왜 네 주인 므비봇셋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시바는 다윗 왕에게 거짓말을 했다. 지금 왕이 이렇게 도망을 가는데 므비보셋은 예루살렘에 남아서 하나님이 오늘 자기 할아버지의 권자를 빼앗은 다윗을 몰아내고 그 권자를 다시 자기에게 주셨다고 한다고 했다.(삼하16:3)

  다윗 왕은 너무 급하기 때문에 거짓인 것도 모르고 므비보셋을 저주하며, 그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서 다 시바에게 주었다. 그런데 다윗이 환궁을 해 보니 므비보셋이 나와서 왕을 맞았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큰 슬픔을 당한 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록 자기 할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된 다윗 왕이지만 진정으로 슬퍼하며, 다윗 왕이 다시 돌아 올 때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않고, 수염을 깍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않았다.(삼하19:24)

  시바는 자초지정을 다 말씀드렸다. 그러자 다윗왕은 시바를 벌하고, 므비보셋의 잃어버린 재산을 바로 찾아 주었다. 이렇게 우리 주님도 다시 오시면 모든 죄를 다 심판하신다. 모든 거짓된 것들을 공정하게 심판을 하신다. 이 재림의 주님이 오시면 모든 죄가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한 변호사가 자기 사무실에 새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새장에는 찌르레기(Starling)라는 새가 있었다. 그 새는 그를 부를 때 대답하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챨리라는 어린 소년이 그 사무실에 왔다. 변호사는 일이 있어서 잠시 사무실을 나갔다가 왔다. 그런데 그가 들어와 보니 새장이 비어 있었다. 변호사는 소년에게 "새가 어디 있니?"하고 물었다. 그러자 소년은 "저는 모릅니다"하고 대답을 했다.

변호사는 "얘야, 내가 나갈 때 새는 새장 속에 있었단다. 그리고 이 방에는 너 혼자 있었잖니? 그런데 새가 어디를 갔니?"하고 물었다. 소년은 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반복해서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아마도 새장 문이 열려서 새가 날아가 버린 것이 아니냐고 대답을 했다. 변호사는 할 수 없어서"찌르레기야, 너 지금 어디 있니?"하고 불렀다.

  그러자 찌르레기가 "저 여기 있어요."(Here I am)하고 대답을 했다. 이 소리는 소년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당시 챨리 소년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그는 새를 훔쳤다. 그리고는 그가 생각하기에 안전하다고 하는 곳에 숨겼다. 그는 자기의 죄를 숨기기 위하여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자기가 믿었던 그 주머니에서 소리가 나와서 그의 죄를 드러냈다. 그때 그는 그 증거를 부인할 길이 없었다. 그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새가 그의 죄에 대한, 그의 도적질과 그의 거짓말에 대한 산증인이었다.

이러한 일이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로 끌려간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숨겨두었던 모든 죄가 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모든 입이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죄는 내가 여기 숨어 있으면 아무도 모른다고 우리를 속인다. 안전하다고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심판대 앞에 서면 다 우리를 대신하고 하나님 앞에 나타나 우리를 정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회개야 한다. 재림의 주님이 오실 때는 오직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의 지은 죄를 지금 다 회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상급이 있다.
다윗 왕이 마하나임으로 피난을 갔을 때, 암몬 족속에 속한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실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터와 양과 치즈를 가졌다가 받쳤다. 어려울 때 얼마나 요긴하고 중요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다윗 왕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윗 왕이 환궁하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 다윗 왕을 배웅하기 위하여 왔다. 다윗 왕은 너무나 고마워서 바르실래 보고 같이 궁궐로 가서 살자고 했다. 그런데 당시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 80세였다. 그래서 "이렇게 늙은이가 궁궐에 가서 산들 무슨 낙이 있겠읍니까? 내 나이에 내가 어찌 좋고 흉한 것으르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까?

  어떻게 노래하는 남자나 여자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누를 끼치리이까?"(삼하19:35)하고 거절을 했다. 그러면서 종은 오직 왕으르 모시고 이 요단으르 건너려는 것 뿐인데 왕께서 어찌하여 이간은 ""을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삼하19:36)하고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바르실래는 종을 그냥 고향에 돌려 보내서 부모의 묘 곁에서 죽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손주 김함이 있으니 그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다윗 왕은 그 김함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다윗 왕의 상에서 같이 먹게 하였다. 이렇게 재림의 주님이 오시면,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한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려울 때, 위하여 수고한 자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린 자들을 위하여 상급을 주신다. 재림의 주님은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한 자들을 위하여 절대로 가만 있지 않으신다.

반드시 갚아 주신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투자한 것들은 반드시 헛되지 않고 다 받게 된다. 로드실스 하우스(Rothshild House)의 초기 섭립자 중 한 사람이 어렸을 때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 필요해서 그의 친구에게 작은 돈을 빌렸다.

그는 담보도 없이 너무 어려워서 그 돈을 썼다. 그는 독일의 먼 곳으로 갔.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거의 반세기가 흘렀다. 이제 그의 가족과 그의 회사는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돈을 빌려 주었던 사람은 그 사람이 옛날의 자기 친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가정은 점점 더 몰락해 갔다. 드디어 건강이 망가지고, 그의 재산은 다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의 가족은 오로지 그에게만 의존하여 살고 있었다. 이렇게 먹구름이 그의 삶에 몰려 올 때, 그는 프랑크프르트에 있는 로드실스 하우스로 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중요한 상담이 있으니 그 회사로 오라는 편지였다.

 그가 그 편지를 들고 큰 은행의 사장의 개인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깜짝 놀랄만한 영접을 받았다. 거기서 나이든 사장을 만났는데, 그가 뜻밖에도 그의 옛 친구였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나자, 큰 은행가는 자기 책상으로 가서는 수표 한장을 가지고 왔다. 그 수표에는 수십만 달러가 적혀 있었다. 은행가는 그 수표를 찾아온 친구에게 전해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것이 자네가 거의 50여 년 전에 나를 믿고 나의 은행에 투자한 돈일세" 친구는 너무나 많은 돈에 놀라서 그 돈을 거절했다.

 "나는 그런 큰 돈을 받을 자격이 없네. 그리고 나는 그런 선물을 원치 않아"하고 거절을 했다. 그러자 은행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선물이 아닐세. 이것은 자네가 투자한 돈의 이익배당금일세. 나는 지난 50여 년간 자네가 나를 믿고 투자한 그 돈의 이익 배당금을 자네에게 보내 왔네. 그러나 자네가 찾아가지 않아서 계속해서 내가 관리했네. 그 돈이 복리(compound interest)로 계산이 되었네" 심프슨(A.B. Simpson)은 이런 말을 했다. "언젠가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투자한 것이 수백 배로 늘어나서 우리에게 다시 돌아 올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투자한 것이 얼마나 잘 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복리로 갚아 주신다."우리도 재림의 주님이 오실 때 받을 상급이 있도록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희생과 헌신으로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투자는 결코 헛되지 않다. 우리 예수님이 잘 관리 하셨다가 때가 되면 복리로,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계산해서 우리에게 다시 상급으로 돌려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상급을 하나님으로 부터도 받아야 하지만, 우리 후손들로 부터도 받아야 한다. 오늘 쉬었다 갑시다, 란에 실었다. 호주에 가면, 시드니시 가까운 곳에 있는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에는 우리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으로 유학을 가면, 한국 유학생에 한해서는 일년 이상 살지 않는 자들에게는 집에 있는 전화를 가지고는 고국으로 국제 통화를 할 수 없단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의 유학생들이 국제전화를 많이 하고는 몰래 도망을 오곤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그랬으면 국제전화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후손들에게도 좋은 상급을 받도록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다가 간다고 해도, 후손들에게 폐를 끼치고 욕을 먹이면, 그는 참으로 잘 못 사는 자들이다.

 파리를 방문했던 자들 중에 지각이 있는 자들은 파리 시내에 있는 두 조각에 대하여 평가를 한다. 파리 시내에는 두개의 조각상이 있다. 그런데 그 두 조각상의 주인공의 첫 번째 이름(first name)은 똑같이 루이스(Louis)이다. 첫 번째는 절대적인 군주 루이 14세이다. 오늘날 루이 14세하면 "짐이 곧 국가다"(I am the state)고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루시 14세는 힘으로 큰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삶의 철학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세계가 그를 섬기도록 정복해야 한다" 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각상으로 부터 몇 블럭 안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조각상이 서 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겉을 꾸미지 않은 조각상이다. 이 돌로 조각한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권력을 상징하는 제복을 입지 않았다. 어떤 빼지도 달고 있지 않다. 어떤 칼도 차거나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왕관도 없다. 이 상은 오늘날 우유 때문에 우리들에게 까지 유명해진 루이스 파스테르(Louis Pasteur)의 상이다. 이 파스테르는 1822-1895년까지 살았던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세균학자 이다.

그를 가르쳐 인류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다. 그의 비이기적이며, 신적인 삶으로 인하여 그 후에 오는 모든 인류가 질병과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인류를 고통으로 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연구를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 화려한 루이 14세의 동상은 다만 돌상에 불과하다.(statue) 그러나 파스테르의 조각상은 성골(Shrine)이 되었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서 온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며, 감사를 드리고 있다. 그는 온 인류로 부터 사랑과 존경으로 관을 쓴 왕관을 쓰지 않은 인류의 종이였다. 우리도 위로부터 하나님으로 부터 큰 상을 받기 위하여 살아야 하지만, 또한 후손들로 부터도 왕관을 받아쓰기 위하여 바른 삶을 살아야 하겠다. 이것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기상변화가 일어나 쓰나미와 같은 큰 물난리를 격게 되며, 기근과 지진으로 인하여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 모두는 명심해야 될 말씀이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