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

 [5:1 ~ 3, 2:43 ~ 47]
 새해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은 본래 밝고 따뜻한 삶을 추구한 민족이이요 白衣民族이라고 한다. 또한 한()이란 말도 환()이란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밝고 환하고, 크고 하나인 삶을 추구했던 한국인이다. 그런데 우리민족은 정치인은 물론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또는 교회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에 이르기까지 부패하고 타락하여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며 질서가 무너지고 종북세력, 좌파들과 국가와 민족을 혼란케 하는 혼돈 속에 빠져들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부모를 거역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오늘 우리민족은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의 삶의 목적을 상실하지 말아야 하고, 분명히 사람의 본분을 찾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확고하게 지향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헤쉘은삶이란 우리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다. 삶을 성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소유권이다라고 했다. 삶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삶의 목적을 되찾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매우 큰 화폭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묘사하는 장면들 속에 종종 사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수많은 천사들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은 삶을 보다 넓은 안목에서 바라봄으로써 중세의 암흑시대로부터 빠져나올 출구를 찾았다고 한다. 우리도 넓은 안목에서 나의 삶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심장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 현대의 암흑시대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는 삶 전체를 통해서 사람들은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인생을 통해서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어렵다.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 훨씬 더 어렵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분명한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첫째, 예배이다.

2장의 마지막 부분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범적 삶을 일러준다. 2:46에는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한다. 47절에는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한다. 이들의 모범적인 삶은 예배에서 성취되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 예배였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예배는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다. 교회란 말의 어원은에클레시아불러 모았다는 뜻이다. 모이면 여러 가지 일을 한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이다. 모여서 예배만 드려도 문제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고 해도 예배드리지 않으면 그 모든 일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또 다른 어원은수나고게인데 이 말은 함께 모인다는 뜻이다. 교회의 어원은 모인다는 뜻이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모임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모여 예배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가 있는 곳에 예배가 드려졌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삶의 목적이다. 구원이란 새로운 삶은 예배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다. 출애굽기 5:1에는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고 했다. 5:3에는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라고 했다. 출애굽의 구체적 목적은 제사였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였다. 예배는 중요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목적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예배드리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이어야 한다. 구원받은 자는 예배드리기를 즐거워해 한다. 구원받은 자는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예배란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 하나님을 높이는 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다. 예배는 어떤 예배이든지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고 찬양을 올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배가 오히려 사람에게 시험이 되고 있다.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가인은 성스런 제사의 일로 가장 가증스러운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제사가 그에게 시험이 된 것이다.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예배가 시험이 될 수 있다.

왜 순서를 이렇게 하나? 왜 이런 찬송을 하나? 왜 기도를 저렇게 하나? 왜 설교시간에 나를 꼬집어 말하나? 왜 십일조를 해야 하나?”이런 모든 생각들이 예배를 통한 시험이다. 예배가 우리에게 시험이 되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삼가야 한다. 나아가서 예배가 오히려 저주가 되기도 한다.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의 직이 세습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제단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그 불로 죽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제사였다. 영이 없는 예배였다. 다른 영을 통하여 예배한 것이다. 이런 예배가 오히려 저주가 된다.

영이 없는 것이 무엇인가? 다른 영이 무엇인가? 예배가 영이 아닌 몸만 와서 앉아 있는 육의 예배가 될 수 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악령이 지배하는 예배가 있을 수 있다. 문선명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예배도 있다. 다른 계시, 다른 명령으로 설교하는 예배도 있다. 이런 예배가 다른 불의 예배인 것이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그의 책영신수련에서모든 좋은 선택에 있어서 그것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한, 우리의 목표는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창조된 목적인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만을 고려해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목적은 단순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은 목적인 하나님 찬양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다.

둘째, 교제이다.

사도행전 2:44에는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라고 했다. 46절에는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지난 교제의 모습이다. 교제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다른 목적이다.

교제는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것을 줄 수 있어야 교제도 가능하다. 예수님은 우리와 거룩한 교제하기를 위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친히 주셨다. 이것이 교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교제는 성도들의 필수과목이다. 교제가 없는 예배, 교제가 없는 성도의 삶이 있을 수 없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성도가 없이는 우리의 삶도 그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옆자리에 있는 성도들은 참 귀한 분들이다.

신약성경에는 교제란 단어를 18회 사용되고 있다. 요한서신에 3, 히브리서에 1, 그 외는 바울 서신에 사용된 바울의 용어이다. 18회중 하나님과의 교제로 사용된 것이 7회이다. 사람과의 교제로 사용된 것이 8회이다. 연보란 의미로 사용된 것이 3회이다. 연보도 소중한 교제라는 것이다.

교제란 말은 라틴어에서는 communio라고 한다. 이 말은 함께 됨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어도communion 혹은 fellowship이라고 한다.

나아가서 교제란 말은 참여하다(participation)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라고 한다. 수직과 수평의 관계가 기독교의 진리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더불어 사람과의 교제가 있어야 참 기독교의 삶이다.

빌립보서 1:4-5에서 바울은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절을 개역성경에서는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한다. 교제를 참여하고 한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복음에서 교제하는 것이다. 교제는 복음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람과의 교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찬송과 기도 그리고 묵상을 통하여 가능하다.

사람과의 교제는 대화와 위로와 친밀한 인간관계를 통하여 가능하다. 존 오트버그는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랑 이야기라는 책에서사랑받는다는 것은 선택받은 것을 의미한다. 선택을 받을 때 나는 무언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선택을 받는 것,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원한다는 의미이다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사역에 동참하게 하는 힘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5:26에는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고 한다. 갈라디아서 2:9에는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라고 한다. 성경은 교제를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교제는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교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탈무드에는하나님 앞에서는 울고 사람 앞에서는 웃으라고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울음과 사람 앞에서의 웃음이 다 교제이다. 최근 교인들의 성향은 교제를 굉장히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배 공간, 교육 공간도 중요하지만 교제 공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회마다 교제 공간을 확보하느라 애쓰고 있다. 교회가 교제할 공간이 없고 쉴 자리가 없으면 교회에 머무르지 않는다.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쉬고, 부모와 아이를 기다리고, 아기를 돌봐주는 공간이 필수적이 되었다. 교제의 자리는 참 중요한 자리이다. 교제가 중요하듯이 교제 공간도 중요한 것이다.

셋째, 전도이다.

47절에는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결과적으로 전도가 되었다. 또 다른 사도행전적 삶은 삶 그 자체가 전도였다. 초대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였다. 복음전파는 예수님의 일이었다. 예수님의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이다. 우리의 책임이며 소명이다. 복음전파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28:20),“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그 외에도 전도에 대한 말씀은 무수히 많다. 전도에 대한 사도들과 성도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성경 구절들이 무한히 많다. 그만큼 전도는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일이다. 전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강력한 명령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지엄한 명령이다.

전파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여러 단어이다.‘케루소란 단어가 있다. 이 말은 선포하다, 공포하다란 말입니다.‘유앙겔리조란 단어가 있다. 이 말은 복음을 전하다, 기쁜 소식을 아뢰다는 말이다.‘카타레고란 단어가 있다. 이 말은 남김없이 말하다는 말이다.‘라레오란 단어가 있다. 이 말은 얘기하다는 말이다. 복음 전파는 다양한 단어로 명령하고 있다. 담대하게 전해야 할 때가 있다.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때가 있다. 알뜰하게 얘기해 줘야 할 때가 있다. 자근자근 풀어줘야 할 때가 있다. 이 모든 것이 다 전도이다.

바울은 복음을 방해하던 사람이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잔해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복음에 빚 갚는 자세로 전도에 열심을 다했다. 사실 거부하고, 반대하고, 핍박하고, 박해했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전도를 잘한다. 왜냐하면 복음에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미안한 생각에서 더 열심히 전도하게 된다. 그런데 전도를 제일 전도 못하는 사람은 예수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주위에 예수 믿는 사람들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자료집에 의하면 전도는 가족이나 이웃, 친구를 통하여 거의 이루어진다고 한다. 예수 믿지 않던 사람이 제 발로 걸어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소위 관계전도가 중요하다. 나아가서 이미지 전도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다. 또한 성장하고 성숙한 교회는 끊임없이 전도열에 불타는 교회라고 말한다. 전도열정은 복음열정이다. 우리 지저스타임즈와 JTNTV인터넷방송도 이러한 열정에 불타는 신문방송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 역시 전도의 불꽃이 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전도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헬라어에서 증거라는 말은 순교라는 말인데, 증거와 순교는 같은 단어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도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우리는 목숨을 걸 일도 없으니까 전도의 열정도 약하지 않나 싶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실이 아닌 거짓된 일에 목숨을 걸었을까요? 세상에 거짓에 목숨을 걸 사람은 없다. 무슬림들은 살려고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전쟁한다. 그래서 그들의 전쟁은 끝이 없고 무서운 것이다. 알라 신을 위하여 죽으면 천당에 가고 천당에 가면 일곱 부인을 준다고 말한다. 그래서 목숨을 걸 수 있다. 이러한 헛된 종교에도 목숨을 거는데 복음은 사실인데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되겠는가?

언젠가는 댄 브라운의 소설다빈치 코드가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이런 적 그리스도, 반 그리스도적인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가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묘사하고, 그리스도교를 거짓된 사기 집단으로 묘사하는 소설이 인기를 얻는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참된 진리가 있는 생명의 종교인 것을 확신한다.

살만 루시디란 작가는 영국국적의 인도인 소설가이다. 이 사람이악마의 시라는 소설에서 알라를 모독했다고 이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호메이니는 살해명령을 내렸다. 그는 지금도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 미국의 어느 신문사에서는 루시디를 지지하는 사설을 썼다가 폭파당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에서 댄 브라운을 살해 명령을 받고 있는가?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는가? 오히려 그는 지금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돈방석에 앉아 있다. 여러분, 이것만 봐도 기독교가 참 종교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잔해하는 소설로 자신의 명예를 얻었다. 물질을 얻었다.

초대교회에도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다. 영지주의(Gnosticism)그노시스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지식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지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영지주의적 해석은 이렇다.“인간의 문제는 죄가 아니라 자기 인식의 결여라는 것이 핵심이다고 한다. 죄 사함이 아니라 자기교화가 목적이다. 그런데다빈치 코드는 영지주의 복음서들을 신약성경보다 더 신빙성을 두고 쓴 소설에 불과하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고 했다. 그 후손이 프랑스 메로빙 왕조를 세웠다고 했다. 그런데 카톨릭의 시온수도회가 이 사실을 알고도 은폐하고 있었다.

시온수도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 사용되던 성배는 사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의 시체라고 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가 교회를 계승하기를 원했지만 베드로가 시기하여 마리아를 창녀로 선언하여 지도자의 역할을 박탈하였다고 한다. 시온수도회는 이런 비밀을 숨겨왔는데 회원인 다빈치는 이 비밀을 그림에 표현하였다고 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의 예수님 곁의 예쁘장한 얼굴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이다. 카톨릭의오푸스 데이라는 단체는 이 사실을 은폐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는 소설이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런 반 기독교적 소설에 대하여 분명한 잘못을 알아야 한다.‘다빈치 코드 깨기라는 책을 보세요. 참 명확하게 기독교의 거짓을 파 해친다는 다빈치 코드의 거짓을 파 해치고 있다. 지금 인터넷에도 반기독교 사이트가 많이 있다. 반기독교 서적과 소설이 많다. 기독교 흠집 내기에 결사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전도는 너무 미온적이다. 전도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결사적이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한국교회 미래 리포트를 보면 교인들 89%가 교회의 존재 목적을 교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이라고 했다. 11%만이 불신자를 인도하는 일이라고 했다. 반면 목회자들 90%가 불신자를 인도하는 일이라고 했고 10%만이 교인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했다. 교회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서 교인들과 목사들의 대답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 특이 한다. 목회자들은 90%가 전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들을 관리해 주기를 바라고 전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인다.

한국에는 전도 왕이 몇 사람이 있는데 그 중 전도 왕이란 별명을 가진 어느 집사는 예수 믿은 지가 얼마 안 된 TV 카메라맨이었다. 이 분이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원래 술을 좋아하고, 예수님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인데 친구가 얼마나 끈질기게 밥을 사주고 졸라대는지 결국 친구에게 밥 얻어먹은 죄로 한번 나와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자기가 아주 끈질긴 전도자가 된 것이다. 방송국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걸렸다 하면 교회에 안 나오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피해 다녔다고 한다. 어느 방송국 기사가 방송 끝날 시간이 되어 문 앞에서 그를 만나 전도해야 된다며 또 달려간다. 결국 그가 배운 대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전도는 열심히 하는 것 밖에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전도의 요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령은 열정입니다. 끈기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충실한 거듭난 삶은 전도에 열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전도는 그 대가도 멋지다. 다니엘서 12:3에는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합니다. 전도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결 론 /이집트 카이로에는 시 중앙에 우뚝 솟은 산이 있다. 마치 서울의 남산 같이 올라가면 카이로 시대가 다 내려다보인다는 것이다. 이 산을모카탐이라 부른다.‘모카탐이란 말은 아랍어로 베어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산의 반대편에 바위가 움푹 파인 천연 동굴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의 이름은 구두쟁이 성 사만(St. Samaan) 교회라고 한다. 성 사만은 10세기 사람이다. 이 사람과 다른 여럿이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키리에 엘레이손을 기도하는 가운데 바위가 떨어져 나갔다.

이 때 떨어져 나간 바위가 100톤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산에서 바위가 떨어져 나가서 생긴 동굴에 교회를 세워 동굴 교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참 아름다운 천연 동굴인데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이 교회를 명물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좁은 입구가 완전히 쓰레기 동네가 되었다. 성 사만은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구두를 고치러 온 어느 여인이 다리를 올리면서 여인의 맨다리를 보았다. 성 사만은 여인의 다리를 본 것이 가책이 되어 자신의 칼로 한쪽 눈을 찔렀다. 성경에서 눈이 범죄 하면 한 쪽 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성사만은 자신의 전 삶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예배드리며, 경건하게 일하며, 전도하며, 섬기며 살아서 성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자신의 삶을 올인 한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너무 소홀한다. 말씀대로 문자적으로 사는 것도 우습게 생각한다. 의미만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의미도 사라지고 있다. 이런 점들이 참으로 안타깝고 아쉽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살려주신 은혜가 너무도 커서 다시 일어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향해 전력투구하는 신문사 방송이 되어야 한다. 목적을 향해 질주하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답게 목적을 향해 올인 하는 지저스타임즈 여러분과 jtntv 인터넷방송을 통한 복음전파를 위하여 모두가 쓰임받는 일꾼의 삶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라나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