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선교의 지평을 바라보며

학장 정기환 목사001.jpg불이 타므로 존재하는 것 같이 교회는 선교를 하므로 존재한다는 강한 이미지의 언어를 던지지 않더라도 교회의 존재 속에 선교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보편적으로 선교는 주님의 지상명령인 마28:19-20, 16:15, 1:8 등을 이끌어 내어 푯대로 삼고 전진을 해 나간다. 혹은 구약의 사6:8 도 수없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말씀에 터를 삼아 선교의 장을 열어온 한국교회의 열정은 세계의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놀라운 성장을 가져왔다. 물론 부분적으로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닐지라도 전반적으로 보아 힘 있는 선교의 사역을 해 오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여기에 헌신을 아끼지 아니한 현지의 선교사들과 그들의 밑거름이 돼왔던 모체의 수많은 교회들의 피와 땀은 주님께서 그날에 큰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

여기에서는 지난날들의 과오나 실책 등을 지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시대에서 선교사가 차지하는 위치와 이 시대에 있어서 해내야만 할 역할 등을 다루므로, 좀 더 효과적으로 빛을 낼 수 있는 방법 등을 찾아가는 것으로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현대 사회의 해부>
빨리 빨리에 매우 익숙해 있는 한국인일지라도 현대 사회의 회전 속도를 보면 급변하는 그 변화를 따라 잡는다는 것은 한 분야의 전문가라 해도 매일 같이 토끼 눈이 되도록 충혈 되어 일을 한다 해도 허덕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만큼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고 하겠다. 무한 경쟁 속에 극도로 세분화되어 전문적 영역을 제공하는 첨단의 일들은 동일한 공간 속에 과거와 미래가 현존하는 착각마저 불러다 준다.

특히 벤처라는 이름의 기업들의 전진 속도는 그들 자체도 놀랄 정도여서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야 겨우 살아남는 형편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으며 우리를 자극하고 있어서 따라잡지 못하거나 앞서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운 세대로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는 시대를 이끌어 가는 머리이다. 실상에서 앞서가야 할 의무와 이유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과거에는 적어도 그래왔다고 본다. 잠깐 과거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영적인 면은 접어 두고라도 세상 사람들이 예민해 하는 방향만 보더라도 그렇다. 교육적인 면에서도 교회가 이끌었고, 치유의 의학적인 곳도 교회를 통하여 주장이 되어 전달되어 갔고, 무지한 사회의 잘못된 면들을 송곳처럼 찔러 개혁시킨 모든 주체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져 왔었다. 그런데 교육을 사회에 빼앗기고 나서부터 교회는 교육의 중심처소가 되지를 못하고 있음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물론 아직도 미개한 나라들에서는 상기의 좋은 면들이 적용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 중진 및 선진국의 모든 면들에 적용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가 감당하는 대부분의 분야가 아예 송두리째 빼앗기고 교회는 순수한 혈통을 지킨다는 명목아래 고리타분한 방법으로 뒤를 따라가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 앞서가는 첨단의 요소들이 교회를 통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회가 저만치 앞서갈 때 겨우 교회는 도입을 하는 형편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매일 같이 영혼구원만을 외쳐대는 것은 옳은 것 같아도 장기적인 면에서 사회의 그룹에 눌릴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 돼 버렸다. 혹자는 현재의 교회 규모가 모든 것을 어느 때까지라도 지탱해 줄 테인데 하는 식의 자신의 시대에만은 안정할 것이라는 식의 자기중심적 사고들이 난무하는 것은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이끌어가야 하는 머리의 모습이 꼬리의 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것이다.

 <새로운 정보화 사회의 등장>
 오늘날 우리를 더욱 분주하게 해 주는 것은 정보화라는 단어와 그들이 가져다주는 물건들 때문이다. 속도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해 주는 것이기에 그냥 지나쳐 버릴 수가 없다. 성경은 말세로 갈수록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여 질 것을 벌써부터 예언해 놓고 있었지만(12:4), 교회는 그 문자에는 누구보다도 익숙해 있으면서도 대비책과 행동에 있어서는 사회에 또다시 뒤쳐지는 듯 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에서도 교회가 뒤떨어져 간다면 교회는 아예 소외된 한 그룹으로 남을 수도 있음을 일찍 감지해야 한다. 서구 교회의 몰락이 여러 면에서 분석이 될 수 있을 지라도 교회 역할의 많은 부분을 사회에 내어 주고 난 후 그 뒤를 쫓아만 가는 신세가 되다가 필요성을 놓치고부터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면 현재 정보화의 대표적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컴퓨터만 보더라도 어떠한가? 이제는 너무나 떠들썩한 가운데 컴퓨터는 반드시 필요하고 알아야 된다는 압박언어에 못 이겨서 교회에 비싼 돈을 주고 들여 놓았다하자. 그렇다고 정보화가 된 것은 아니다. 활용할 줄 모르는 비싼 고철 덩어리는 높으신 당회장님의 손에서는 사무실의 장식품이요, 좀 더 한 걸음 나갔다고 하면 장기 바둑이나 몰래 두는 오락기로 값이 하락되어 있는 처량한 모습이다. 그보다 진보되어 있다 해도 고급 타이핑으로서의 도구 정도이거나 기본적인 인터넷 왕래 이상을 별로 발견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컴퓨터라는 요물은 그런 모습으로 남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젊은 전도사들의 손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 보이다가도 보장되지 못한 그 자리는 어느 날 훌쩍 떠나가 버리면 쓸모없는 골치 덩이로 변신을 하고 만다. 어떻게 그 속에서 뛰고 나는 세상 속의 저들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가능성을 향하여>
 우리가 아는 바처럼 초대교회에서는 사회를 리드하였고 변화시켰으며, 담대하고 주목받던 교회들로 연전연승하였었다. 물론 중세의 세월로 접어들면서 위기 속에서 방황하던 시절들도 있었지만 현대의 부서져 가는 위기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또 한 번의 좋은 호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본다. 이미 성경을 통하여 미래를 확실히 짚어갈 수 있는 비밀을 소유한 우선권이 확보되어 있다.

아울러 주 앞에 합당한 삶을 이어갈 때에 분명 머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믿음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소유케 하여 주실 것에 의심이 없다. 일반 사회인들이 새로운 발견의 첨단들을 교회에서 배울 것들이 존재할 때 다시 교회를 주목하고 발을 딛지 않고는 앞서갈 수 없도록 만들어 간다면 폭발적 선교의 역사도 재흥될 것을 확신한다.

 이를 위하여 정보화의 가장 적절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영역은 뭐니 뭐니 해도 선교의 바탕에서 발견될 수가 있다. 선교는 원거리와의 공동 작업이기 때문에 정보화의 활용은 필수적이다. 때가 악한 이때에 세월을 아낄 수 있는(5:16) 최고의 수단은 바로 정보화의 활용인 것이다. 아프리카의 오지로부터 뉴욕, 서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그물로 짜 가며 폭탄처럼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일감의 요소들이 이미 깔려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기업이 현재 전 지구상에 펼쳐져 있는 선교사들처럼 곳곳까지 파고 들어가 있는 곳이 있는가? 그들은 이득의 계산을 넘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교의 일은 깜깜하고 비참하고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땅일수록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이 그물 작업을 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선교사들인 것이다. 선교사들은 공수 특전단의 낙하산 부대로서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사막으로부터 최첨단 빌딩이 가득한 도회지에 이르기까지 발이 머물지 않은 곳이 없다.

 다만 이 특전 부대간에 아직 연결고리가 없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면에서 이미 좋은 기반을 가장 적절하게 갖고 있는 곳 역시 선교사들의 발자취 속에 있다고 볼 수가 있겠다. 이 역할을 한국교회가 본부가 되어 감당한다면 이 21세기에는 가장 뛰어난 모습으로 부각이 될 것이다. 현재 전 세계에 파송 되어 있는 선교사의 양적인 면에서도 가장 앞설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며 전투적 기질에서는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

  <21세기 선교사들>
  현재까지의 대부분 선교는 각개 전투식이었다. 물론 교단별 혹은 선교단체별로 하는 등의 언어는 많지만 그것으로 전 세계를 이끌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국가의 벽들이 무너지고 있는 글로벌시대이다. 이 때에 첨병의 역할을 담당하는 희생적인 선교사들은 아무래도 아래와 같은 역할로 돌아 갈 때 세계를 이끄는 열쇠는 다시금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만약 현재에 안주하여 지속된다면 사분오열 된 속에 패잔병들이 되어 상처 치유에 온 세월을 보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는 정보화시대에 최 첨단병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여기에는 그 만한 실력무기의 공급이 필수적이다. 실력을 갖추어 가는 것은 선교사의 역이요, 무기의 공급은 후원지역의 몫이다.

 둘째로는 글로벌화 된 세계에서 World Network을 만드는 일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오지에서 복음만 전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날라 가는 비행기를 화살로 쏘아 맞추어 떨어뜨리려는 사고와 같다고 하겠다. 나만이 살아있으면 된다는 사고는 냇물의 한 모퉁이에 있으면서 냇물이 마르는 삼 년 가뭄에도 상관없으리라는 넋두리에 불과하다. 주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를 원하시고 세계 자체가 이제는 투명하게 보이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야만 한다. 국내에는 부서진 조직들이 산재해 있어도 선교사간에는 이미 부터 연합체적인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긍정적이다.

 셋째로는 선교지의 일들에 대한 지식의 공유이다. 놀라운 비법을 수제자에게만 전수해 주는 방법론은 무협지에서는 재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일에 있어서는 아무에게도 유익이 되지를 못할 것이다. 천국의 복음이 항상 오픈 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위치에서의 사역이 함께 공유될 수 있는 자료로서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이는 타 지역의 복음을 위한 싸움에서 매우 귀히 쓰이는 무기가 될 것이다.

 끝으로 선교사들을 통한 그 광활한 시야는 본국을 깨우는 약재가 되어야 한다. 바울이 선교의 사역을 하면서 도리어 예루살렘교회를 여러 모양으로 도울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직도 기존 틀에서 버티기 작전을 하는 본국의 교회들에게 신선한 요소들을 공급해 주어야할 빚을 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21세기는 선교사들의 그 놀라운 특공 작전으로 후방에 안정감을 주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권세를 갖고 이 시대를 크게 인도해 가는 위치로 격상될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