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배아 복제에 대한 성경적 답변

학장 정기환 목사01g03.jpg 얼마 전의 뉴스 속에서 이 나라를 들뜨게 하던 사건이 있었다. 한동안은 배아복제에 대한 논란이 한여름 더위처럼 기승을 부리는가 싶더니 잠시 잠잠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다시 유럽의 한 모퉁이에서 이문제가 법적 보장속에서 다시 진행되는 뉴스들을 접하면서 뜨거운 감자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도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임상시험에 대한 기사들을 다시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한 많은 견해들이 있지만 가장 정확하게 선을 그어 주고 있는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 여기에서 해답을 얻어 보고자 한다.

  배아복제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부채질을 하는 것은 늘 수식어처럼 장식하는 말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병장수시대가 도래했다느니 난치 및 불치병의 치료길이 열렸다는 등으로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듯한 흐름에 외국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찬반 논쟁의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토론들이 한창이다. 이즈음에서 정립되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는 기독교적 입장은 어떠한가? 그동안 침묵 속에 있는 듯 하던 교계에서도 실질적 관심과 의사를 표출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분명 교계는 사회를 이끄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야 하기에 뒷전에 밀려있거나 모든 것이 진행된 후에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가져서는 결코 사회를 이끌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진행을 보면 대개의 경우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거나 윤리적 혹은 인간적 잣대로 찬반 논쟁 속에 있어서 자칫 혼탁한 물결 속에 휩쓸릴 가능성이 높아져있다. 자신의 사고를 통한 진출은 그것이 옳을지라도 동일한 반박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변호하려는 노력에는 격려를 보내지만 결국 결론 없는 논쟁만 양산할 수 있어서 자칫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혼란한 사고에서 방황하게 할 우려가 있다. 우리 신앙인은 우리를 창조하신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그분이 원하시는 것인지 아닌지를 듣고 그에 대하여 응답하면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점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막연히 창조질서의 파괴라든가 윤리성에 걸림돌이 된다든가 복제인간이 생긴다면 말이 되겠는가 등등의 열변으로는 설득력이 없다.

 성경적 토대가 없는 답변은 그 사람의 의견에 불과할 수밖에 없기에 또 다른 반박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복제에 대한 과학의 접근은 역사성을 놓고 짚어보면 매우 최근의 일들이다. 급진적 발전은 마음을 정돈하기 전에 이미 또 다른 산물을 내놓고 있을 정도로 발 빠른 진보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1996년 영국의 로슬린연구소에서 복제 양 돌리를 선보인 이후로 UN까지 개입하여 의견을 내놓을 정도로 이제는 복제에 대한 견해들을 내놓는데 너나할 것 없이 불을 뿜어대고 있다.

 현재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은 배아복제에 대한 점이다. 여기서 배아란 태아와 구분이 되는데 이는 수정란이 만들어진 후 14일 전까지의 세포덩어리를 일컫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교계에 있는 분들 중에도 태아 이전이기에 생명체와 관계가 없다든가 영혼의 문제를 논할 단계가 아니라든가 하는 언어로 배아복제에 찬성표를 던져놓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배아, 태아, 줄기세포 등에 대하여 익숙치도 않고 의미 파악도 안 된 상태여서 그저 그런가하며 따라가기도 한다. 배아에 대한 다양한 생물학적 설명들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숙지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상태에 대한 성경적 답변 듣기를 원하는게 주제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장을 함께 열어보기로 하자. 전반부에는 엘리사벳에게 세례요한이 잉태될 것을 예언하고 또한 이 예언이 성취되어 26절에는 여섯째 달로 접어들고 있다. 이때에 나사렛의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수태할 소식을 전한다. 마리아의 걱정스러움이 설득되고 38절에서는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면서 주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오시는 과정을 갖게 된다. 이때에 마리아가 유대의 한동네에 머물던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장면이 39절로부터 이어져 있다.

  마리아의 문안을 들은 엘리사벳의 뱃속 아이 즉, 미래의 세례요한은 복중에서 기뻐 뛰고 있다. 이때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하여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자 여자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42. 현재 마리아 태중에서 어떤 상태로 계실 분을 아이로 표현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또한 43절에서는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하는데 마리아를 주님의 모친으로 즉 태중의 그 분을 주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럼 현재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태중에서 어떤 상태로 계신가?

 현재 마리아는 39절에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 라고 하였는데 이때란 엘리사벳이 42절에 아이라고 일컬었던 분, 43절에서 주님으로 불렀던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기간을 설정해 줄 수 있는 때이다. 본문은 38절에서 순종의 고백을 한 후 엘리사벳을 만나기까지의 공백 기간이다. 일반적 영어 표현은 A few days 혹은 KJV에서 in those days 로서 이는 적어도 그 날 혹은 몇 날에 불과하다.

 이 때에의 원어의 표기는 ?ν τα? ?μ?ραι? τα?ται?인데 여기에서 때를 가르키는 ?μ?ραι?(헤메라이스)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원어가 쓰이는 신약의 수많은 구절들이 낮(4:2; 4:27), 사흘(6:7; 9:9), 엿새(9:2; 12:1), 여드레(20:26; 7:8)등에 사용되고 있으며, 길게는 놀라웁게도 열나흘(27:33)에 제한되어 있다. 즉 어떤 경우를 보더라도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주님은 배아의 상태로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벳의 입술을 통한 외침은 42절에서 아이요(원어는 καρπ?? 열매 혹은 자손 행2:30), 43절에서 주님이란 표현으로 성령이 충만하여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배아도 분명 생명으로서 지시되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이는 또 다른 변명거리를 불러들일 수가 없는,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좌지우지 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 아닌가 반박을 살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오해이다. 배아복제가 아닌 골수혈액이나 제대혈을 활용하는 성체줄기세포의 연구에는 박수를 보내며, 또한 많은 진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에 대한 기대와 기도를 아끼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과학의 발전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진전되어가는 과학을 반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성경적 토대 위에서 진보가 이루어져가고 있는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고 또한 답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혼란도 없고 올바른 발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기환 목사
사단번인 기독학술원 이사장
민족복음화운동본부 학술원장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학장
세계원주민선교회 회장
CJTN방송 지저스타임즈 상임이사
부천 전원중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