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未來를 위한 敎育의 改革을 위한 硏究 -7-

(韓國近代敎育의 始作과 發達의 歷史的 考察)(1884-1945)

칼럼리스트 金 昌 龍 牧師(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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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 숨 가쁘게 요동치는 한편에서는 5백년 철저한 신분제의 동토에 조용한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일으키는 신문화 양풍이었다. 만인평등의 기치를 내걸고 건너온 그들은 교육과 의료에서 조용히, 그러나 쉬지 않고 이 땅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필자는 이것이 개혁의 바람이요 성령의 바람이 아닐까 한다.

 

근대교육의 설치에 기독교 선교사들은 공헌하였다. 교회가 설립되고 학교와 병원이 세워졌다. 교회에서 주일학교는 매일학교를 운영하여 지역에 자녀들에게 글과 학문과 신앙심을 심어 주었으며 나아가 애국애족의 마음을 가르치는 곳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포교활동과 교육활동, 의료 활동을 병행하여 실시하여서 한국 근대사회에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노량진-제물포를 시작으로 한성-의주, 한성-부산포 간에 전신선이 가설되어 통신 속도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것도 이때였다. 전신 개설로 인해 신문화는 거의 동시에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의사 지석영은 왜국에서 건너온 「종두귀감」을 근거로 독자적으로 종두를 개발하여 백성들에게 접종하기 시작했다. 지석영은 국문연구소를 설치하여 한글 발전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고종 24(1887), 자영은 서양 각국에 독자적으로 외교관을 파견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 부인들을 접촉하면서 얻어들은 국제정세는 안에서 관망하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해 5, 고종은 1차로 민영준을 주일공사에, 김가진을 참찬관에 임명하여 부임시켰다. 6월에는 박정양을 주미공사에, 조신희를 영국 덕국 법국 노국 의국(이태리) 5개국 전권공사에 임명했다.

 

고종은 청과의 종속관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이러한 사실을 청국공사 원세개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 이 일은 결국 이홍장이 직접 개입하여 조선이 다음과 같은 어정쩡한 조건을 수락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 조선 외교관은 외국에 가면 먼저 청국공사관에 통지하고 청국공사와 함께 그 나라 외무부에 간다. 2. 그 나라의 공식행사나 연회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의 뒤에 선다. 3. 국가 간 중요한 협상은 먼저 청국공사와 논의한 연후에 추진한다. 체면과 명분을 앞세우는 청국의 요청에 따라 참으로 민망한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927일 워싱턴에 도착한 주미공사 박정양은 참찬관 이완용을 데리고 곧바로 미국 국무부를 예방했다. 박정양은 이후에도 청국 공사관을 방문하지 않아 청국공사로부터 힐난을 들었지만 외교고문 알렌을 보낸 게 고작이었다. 알렌은 청국공사를 만나 ‘우리는 본국 정부로부터 훈령을 받은 바 없어 외교 관례대로 행동했으니 양해하라’고 통보했다. 모두가 조선이 독립국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자영이 치밀하게 지시해둔 공작이었다.

 

본국을 거쳐 이 모든 사실을 전해들은 원세개는 분기탱천, 고종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소? 어딘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오. 박정양은 신임장을 제정하는 대로 곧 귀국시키도록 하겠소.” 고종은 대수롭잖은 일로 뭘 그리 요란을 떠느냐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할 뿐 청국에 대한 사대의 표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고종의 약조와 달리 박정양은 2년 임기를 꼬박 채웠다. 한술 더 떠 고종은 친청파인 김윤식을 유배형에 처하고 친일파 김가진을 민영준의 후임 주일 대리공사로 임명했다. 원세개의 짐작대로 이 모든 일은 자영이 막후에서 조종한 일이었으며, 자영은 친청 친노 친일 인사를 두루 기용함으로써 외세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종 25(1888)부터 조선의 열강 외교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원세개는 주어진 외교적 권한을 뛰어넘어 고종 폐위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조선 정가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녔다.

 

이홍장 또한 제 코가 석자라 임기를 훨씬 넘긴 원세개를 소환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를 옭아맨 ‘올무’는 서태후의 사치였다. 서태후는 장차 섭정에서 물러난 뒤에 머물 별궁 이화원을 지으면서 예산 3천만냥을 쏟아 붓고 있었다. 청국 해군의 1년 예산 4백만 냥은 흔적도 없이 이화원으로 흡수되었다. 인공 산과 호수를 곁들인 이화원은 진시황의 아방궁을 능가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호화로운 별궁으로 재정의 블랙홀이었다.

 

이때 이홍장이 관장하는 청국 해군은 7천톤급 철갑함 2, 2천톤급 순양함 5척을 거느리고 있어 왜국 해군의 전력을 능가했다. 이후 서태후의 전횡으로 전함을 추가 도입하지 못함으로써 청국은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에서 패하여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생각은 없고 권한만 방만하게 가진 한 여인의 호화 사치가 결국 조왜 세 나라의 명운을 요동치게 했던 것이다.

 

자영은 함경도 경흥을 개방하여 러시아와 육로통상을 개시하고 미국 군인을 군사교관으로 임용하는 등 균형외교를 도모했지만, 그녀 역시 바닥난 재정으로 인해 큰 그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자영 또한 호방한 배포에서는 사태후에 못찮았으나 국력이 그녀를 옭죄고 있었다. 관리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민원이 낭자하고 흉년까지 겹치면서 각지에서는 잇달아 민란이 일어났다. 자영이 불혹에 접어든 고종 27(1890) 4, 대왕대비 조씨가 승하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