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未來를 위한 敎育의 改革을 위한 硏究 (6)

(韓國近代敎育의 始作과 發達의 歷史的 考察)(1884-1945)

칼럼리스트 金 昌 龍 牧師(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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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에 이어서

3) 기독교 선교사에 의한 근대학교의 설립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의 시행에 공헌한 집단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을 들 수 있다. 기독교 선교사의 대부분은 미국인들로서 1880년대 초반에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을 하게 되었다. 특히 1884년에 개신교 선교사인 알렌(Allen R. S. Macley) 등의 입국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여 나갔다.

 

선교사들은 고종에게 선교 의료 교육 활동의 허가를 득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알렌은 의료선교사로서 그 활동의 영역이 선교 의료 학교 등으로 다양하고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1885년에 아펜셀러, 언더우드 등의 목사들이 내한하여 더욱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대표적인 교육기관은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정신학교 등을 들 수가 있다.

 

고종 22(1885), 미국인 목사 아펜젤러는 한성에 학당을 세워 청년들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고종은 반상을 가리지 않는 이 학당에 나라의 새로운 제목을 키워달라는 뜻에서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영국 선교사 뱅커와 길모어는 영어를 가르치는 육영공원을 세웠다. 미국인 의사 알렌이 재동에 세운 무료진료소 제중원은 훗날 세브란스의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로 발전한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는 광혜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한편 고아원을 설치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경신학교는 언더우드목사가 1886년에 한성 정동에 고아원을 설립한 것에 비롯된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에서 고아들을 상대로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실시하다가 1891년에 학교체제로 전환하여 언더우드학당(예수교학당)으로 개편하였다. 예수교학당에서는 체조 작문 산술 지리 등의 교과를 가르쳤다.

 

배재학당은 1885년에 아펜셀러가 개설하여 초기에 2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친 것에서 출발되었다. 배재학당은 1886년에 고종황제가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함으로써 더욱 발전을 하게 된다. 배재학당은 배재학당규칙을 제정하여 근대학교의 형태를 완전하게 갖추었다. 배재학당의 교육내용은 영어, 성경이 중심이 되고 한문, 천문, 수학, 역사 등의 근대 학문에 의한 교과목을 교육하였다.

 

고종 23(1886) 5월에는 미국인 선교사 스크렌튼의 부인이 정동 자기 집에서 단 한 명의 여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여자에게는 교육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5백년 금기를 깬 첫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이듬해 건물을 마련하여 학생 수를 늘린 이 학교에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신여성 교육을 지원했다.

 

이화학당은 여선교사인 미국인 스크렌톤(Scranton)1886년에 방 한 칸으로 개설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당시 왕비(민비)는 이화학당이라는 편액을 내려 주어 교명을 지었다. 이화학당은 초기에 그 발전이 미흡하였다. 교육단계는 초등학교 수준에 머물고 찬송가를 영어로 가르치며 산술, 언문, 역사, 한문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그리고 학생과 교사의 확보도 어려웠다. 정해진 학규가 생긴 것도 1902년경이었다. 근대교육에서 여성의 교육에 어려움이 있었다.

 

스크렌튼부인은 수원에 삼일 여자학교를 세웠다 후에 매향으로 이름을 바꾼다 정조가 새로운 개혁을 위해 화성을 세운 그 도시에 하나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이 공부하는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그들에게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님 한분임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르치기 위해 삼일학교라 명하였다. 교훈은 "경천애인"(22:37-39)[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37] Jesus replied: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38] This is the first and greatest commandment. [39] And the second is like i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수원성 한복판을 흐르는 개천 옆 가난한 저자거리의 교육도 받을 수 없는 여자아이 3명을 모아 학교를 시작했다. 후에 그 학교는 조선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란 인물이 배출된다. 필자는 역사의 교육의 산실인 매향에 가끔 들리고 그 정원에 오랜 세월의 풍상에서도 꿋꿋이 자태를 지켜온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기도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 체플을 인도한다.

 

만약 이 학교가 서울에 세워 졌다면 이화처럼 유명한 학교가 되었으리라. 필자는 “매향 100년사”에서 조선말 선교사들의 열정 있는 사역의 열매들과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뿌리와 역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1902년부터 1945해방까지의 우리나라 교육의 역사를 아주 잘 기록하며 일제 강점기간 우리나라 학교들의 가슴 시린 아픔을 느끼며 공감할 수 있었다.

 

차근차근 시간을 가지고 우리나라 교육의 뿌리와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신앙과 학교를 지키려 몸부림쳤던 믿음의 선배들과 교육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공감하며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는 의로운 자들에게 사명의 불씨가 되길 소망하는 바이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