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경적상담과 기독교상담의 차이

김주원 박사.jpg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했던 사도 바울의 목소리는 현대 교회를 향하여 도전으로 다가와야 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 전서 3:5 ] 여러 가지 형태의 경건의 모양이나 행위들 그리고 많은 화려함이 있을 지라도 분명한 능력이 보여지지 아니하면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과는 관계없는 인본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인류애적인 행동일 뿐이다. 대구의 모 유명한 교회에서 하는 사회복지 사역의 일환으로 급식을 하는 곳을 방문해 본적이 있다. 깔끔한 시설과 규모 많은 숫자의 자원봉사자들이 나와서 열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신중한 모습으로 그 사역을 들여다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식사하는 동안 잔잔한 음악과 함께 들려지는 외국 가스펠송이나 혹은 가끔씩 등장하여 국악 비슷한 공연을 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는 언제 또 급식이 있을 것이라는 광고와 함께 교회 안내를 하는 것으로 모든 순서를 마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다. 노숙자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된 음악과, 교회와는 관계없는 사물놀이 비슷한 공연, 그리고 교회소개가 전부였다. 막대한 공사비를 동원하여 사회복지시설을 세웠으면 그리고 많은 수의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여 교회의 헌금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먹이는 일을 하려고 했다면 왜 이러한 일을 하는 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시행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지 사람들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해결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교회의 구제와 복지 사역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요한복음6:26 ] 교회의 사역은 분명한 목적과 사역동기 그리고 결과로 완성이 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분명히 그것을 인도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말씀에 분명히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교회는 무엇이 두려워서 복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인가? 굶주림을 해결해주고 목마름을 해결해 주면 복지사역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림과 목마름의 해결은 복지사역 혹은 복음사역의 시작일 뿐이다. 아무리 깨끗하고 멋있는 건물과 영양가치가 높은 식단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궁극적인 기독교적 복음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결국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배부른 까닭] 이라는 말씀으로 도전해 주고 계신다. 현대 교회가 복지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들을 한다면 분명히 이 사역이 [배부른 까닭]에 그치는 것인지 분명히 말씀 안에서 조명해 보아야 하고 평가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도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염려하거나 두려워한다면 과감히 교회는 사역이라고 말하는 이러한 행위들을 그만 두어야 한다. 교회가 말씀의 본질로 회복된 후에야 감당해야 마땅하다. 교회와 성도들의 헌금은 낭비되어 지고 무엇인가를 나타내려고 하는데 쓰여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 단순히 교회에서 밥이나 나누어주고 음악이나 틀어주고 하는 것이 복지사역(?)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사역이라는 근본적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를 말씀 안에서 살펴보고 성찰해 보아야 한다.

사람이 살려 지는 일에 무엇이 부끄러운가? 사도바울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로마서 1:16]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분명한 능력을 만들어 내는 기초가 된다. 우리가 세상 앞에서 부끄러움을 상관치 아니하고 하는 모든 행동들이나 능력들 그리고 말씀의 확신 안에서 행하는 모든 외침은 모두 복음과 관계가 있는 것이어야 하고 또 그러한 것이라면 당연히 나의 부끄러움이나 교회의 부끄러움은 없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당연히 복음이 부끄러워지게 된다. 노숙자들이나 알코올중독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말하는 중독자들에게 다가감에 있어서 그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않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 무섭고 두려워서 양보하고 타협하고 다가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강력한 진을 파하기도 하며 사람들의 죄악 된 심성을 꺾고 나아 가게 하신다. 그러하기에 사도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고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 목회 혹은 사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과 충분성을 분명히 인지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면 분명히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사람들을 보게 될 것 이다.

장황한 서론적인 글, 또는 교회의 급식이나 복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것이 옳고 그름을 논하려고 하는 것 보다는 근본적으로 왜 이러한 사역을 하는 것인가? 하는 부분과 이러한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능력 있는 사역을 전개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것이다. 더 확대하자면 교회는 저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과 말씀으로 행하는 것을 이야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결과가 있고 능력이 있는 말씀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것을 논하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교회들이 프로그램 중심적이고 개교회의 독창적이고 특징적인 것들을 개발하여 교회를 알리려고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 또 그러한 일(사역)들을 이루기 위해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이나 운영들이 비성경적이거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많은 부분이 상충되는 것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밥 한술 나누는 것에 있어서도 [부끄러운] 듯한 모습을 보이는 현실 속에서 교회의 중심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성 보다는 말씀의 부족성으로 인하여 [심리학이나 세속 상담학]의 영향을 받은 이론들이나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현실속에 다시 한번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정신과 [말씀으로 돌아가야]하는 큰 이슈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교회가 밥 한술 주거나 혹은 그들의 필요한 부분만을 공급해주는 구제의 개념으로서의 복지 혹은 사역을 생각한다면 교회는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재활이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하게 하는 가장 큰 적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의 새 생활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안주하게 하고 얻어먹는 근성을 계속 해서 붙들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위안하기를 자신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구제나 사역은 인간들의 외적인 변화에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인간의 내적인 변화에 신경을 기울여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변화만이 진정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처럼 수십 년 동안 길거리에서 밥을 퍼주고 국을 퍼주어도 그를 통하여 진정으로 복음 안에서 변화된 영혼이 없다면 그는 헛일을 한 것이며 성도들의 귀중한 헌금을 낭비한 것이다. 자원봉사자들이 늘어나고 조직이 커지고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거리의 사람들이 진정한 변화를 누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들을 볼 수 있는 그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