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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호에 이어서) 죄가 주는 오염력이나 혹은 사람들에게 있는 죄성의 열매들이 현실을 살면서 나타나는 비성경적인 삶의 열매들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삶의 갈등들과 구조 혹은 그로 인하여 파생되어지는 죄책감들의 열매는 곧잘 우울증과 비슷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이것은 성경속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건들이고 현상들이다. 실재로 삶의 문제들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문제들을 성경속에 비추어 보면 성경과 역행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려고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들의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어떠한 병명(name of disease)을 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죄(sinful nature) 라고 명명을 한다.

성경속에 나타난 엘리야의 경우도 그가 사는 삶 속에서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행했던 행동들은 우울증의 전조현상 혹은 우울증과 비슷한 정신적인 현상이라고 보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죄된 인간의 속성 혹은 죄성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거나 못 믿었거나 하는 믿음과 신앙의 문제로 잘잘 못을 따지는 것 보다는 오히려 엘리야가 바라보았던 하나님의 주권적인 문제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면 되지 않을까 싶다.

신약성경에서 엘리야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은 세례 요한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엘리야와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엘리야는 권력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신약의 엘리야라고 말하는 세례 요한은 권력자의 비리와 부정 그리고 음행한 연고에 대하여 정확하게 말을 했던 사람이다. 형제의 아내를 취했던 음란한 사건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대항했으며 그 결과는 비참한 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성경은 어느 한 곳에서도 세례 요한이 무서워 했거나 도망을 쳤다는 기록이 있거나, 권력 앞에서 죽기를 자처했다는 기록도 없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 보다 더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이 크게 쓰셨다 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 두 사람 다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았던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같은 열심을 가진 사람들, 불 같은 성정의 사람들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리모트 콘트롤에 의해 조정되어지고 움직여지는 로봇과 같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감옥속에서도 당당했던 세례 요한의 모습과, 도망치던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은 신앙의 깊이나 열심보다는 개인의 삶의 모습과 패턴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삶의 본질을 이해 할 때 이 두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오랜 감옥생활 속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메시야 이심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던 세례 요한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여지고 또 확신이 없어서 우울하고 조급한 사람이라고 판단이 되어지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정신과에서 말하는 의부증이나 의처증 혹은 남을 의심하여 견딜 수 없는 조급함으로 오는 우울증이나 조울증의 경우에 대하여 예수님의 메시야 여부를 묻는 세례 요한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또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다만 본인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고 또 그러한 그의 열망이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작은 의심 혹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을 과연 우울증이나 조울증과 같은 정신병의 영역에 둘 것인가 아니면 믿음이 없는 죄인 된 인간의 죄성에 원인을 둘 것인가는 스스로의 믿음에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원인이론 중에 [심리적 요인]을 주장하는 정신과 의사들이나 심리상담가들은 부부/가족간의 사별, 불화, 고부간의 갈등, 자식 문제, 실직 등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심리적 요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자식들이 다 성장하고, 남편도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를 얻은 후에 혼자서 느끼는 공허감과 자신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자신이 우울하다고 이야기했을 때 생활이 너무 편해서 별 쓸데 없는 소리를 한다고 핀잔을 주는 남편으로부터 느끼는 괴리감 등이 큰 심리적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하며, 빈둥지 증후군(자식들이 성장하여 독립해 감에 따라 느끼게 되는 공허감과 활동적으로 사회 생활하는 남편과 비교했을 때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 등의 증상)등을 말하는 것을 자주 본다. 이러한 심리적인 원인들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역시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지는 평범한 삶의 모습이나 증상들이 대부분이다. 가족들이 사별하거나 불행한 일을 겪으면 슬픈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 속에 오랫동안 빠져있거나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실직 등의 이유로 많은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당신은 우울증환자요 그러하기에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 보시오.” 라고 말을 하고 그 사람을 병원에 보내면 그 사람은 그날부터 정신병 환자가 된다. 오히려 교회는 “당신이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바라보시오.” 그리고, 교회가 당신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지를 연구하면서 함께 어려운 시간을 넘어주면서 힘이 되어주는 것이 그 사람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성도를 정신병자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믿음의 일꾼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순전히 교회 리더십의 판단에 달려있다. 교회에서 1년 365일 계속 이야기하는 복음의 능력이나 믿음은 과연 위에서 말하는 심리적요인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혀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인가? 정말로 정신과 의사들이 말하는 정신병적인 이유 때문에 하나님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의사들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