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적상담과 기독교상담의 차이

 김주원 박사1.jpg                       일반인들이나 초신자들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씀 구절 중에 하나를 선택해 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의 말씀일 것이다. 하도 많이 들어서 혹은 교회의 교육속에 성경부분에 대한 장이 나오면 반드시 등장하는 구절이기에 사람들은 너무도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으며 또 쉽게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 있어서 이 성경구절 만큼 많이 읽혀지는 것 만큼 믿지 못하는 구절이 이 구절이 아닌가 싶다.

디모데 후서 3장 16-17절에 의하면;“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디모데후서의 말씀처럼 “성경이 우리를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한다” 라고 말은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외에 다른 인간들의 사상이나 생각들 혹은 경험들을 첨가한다면 사람이 온전케 되는데에 도움이 될 것 아닌가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시편기자는 19:7-8절에게서“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처럼 여호와의 율법은 분명히 완전하고 또 영혼을 소성케 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 우둔한자로 하여금 지혜롭게 하며 또 순결하여 눈을 밝게 만드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시편기자의 말씀을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고 천지는 없어져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분명한 영향력을 주기 때문이다.

베드로 후서 1장 3절에서 사도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라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께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들을 알아 낼 수도 있고 또 말씀이 분명히 우리의 삶과 경건에 속한 것들 그리고 세상의 철학이나 사상들을 의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광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분명하게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하다면 왜 사람들은 거기에 인간의 지혜를 첨가하려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우리의 삶과 죄의 문제 그리고 우리들의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부족하여 자꾸 자신들도 모르는 지혜나 철학을 첨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가? 답은 의외로 단순하고 쉽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자로 지혜롭게 하며”, “순결하여 눈을 밝게” 라고 말씀하시는 것들이 정말로 믿어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외에 다른 것들을 첨가 할 수 없다.

기독교상담과 성경적상담을 말하자면 사람들은 흔히들 같은 것이라고 구분없이 사용한다. “같은 것 아닙니까?” 라고 말들을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분명히 다르다. 마치 누룩을 넣은 밀가루인가 아니면 하나님앞에 드려지는 정결한 밀가루인가를 구분하는 것 만큼 다르다. 누룩을 넣은 밀가루나 넣지 않은 밀가루가 겉모양으로는 비슷해보이거나 구분을 하기가 어려워도 빵을 만들거나 혹은 목적한대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본다면 결과는 분명하게 다르게 나타난다. 기독교상담(흔히들 크리스찬카운셀링 Christian Counseling)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도 하고 나름대로 상담자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인임을 내세워 하나님의 방법대로 상담을 하며 성도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 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따지고 보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론들이나 혹은 본인들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헛된 심리학적인 이론들을 합리화하고 합당화 하기 위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포장지로 사용하고 있는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해석하거나 꿰어 맞추기 위하여 학문(특히 심리학)이라는 미묘한 이름을 빌려서 그 위에 덮어서 정체를 모르게 만들기도 하려는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조금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마치 현대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안 하면 뒤떨어지는 교회 혹은 유명한 알파나 혹은 G** 뭐라는 것을 안 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교회인 듯한 느낌을 갖는 것처럼 사람들은 느끼기도하고 말들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이러한 단어들은 현대 교회에 나타난지 그리 오래되지 않는 새로운 신종용어들이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훈련]이라는 단어들이 있었을까? 아니면 지금의 현대교회처럼 어떤 훈련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이 변한다는 가정하에 [아버지학교나 어머니학교 또는 상담학교등등] 이러한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이 변한 기록들이 있었는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쉽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제자훈련프로그램]에 다니거나 [아버지 혹은 어머니학교]등등과 같은 프로그램에 다니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순종했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고 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자로 지혜롭게 하며”, “순결하여 눈을 밝게”라는 말씀속의 단어들이 그들의 가슴과 심장을 쥐어 짜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진정한 제자로)들로 세웠다. 흔히들 개혁주의 기독교공동체의 프로그램들이 아닌 천주교나 혹은 힌두교 혹은 참선을 중시하는 어떤 철학이나 종교에서 가져온 것들을 마치 기독교에 내려왔던 전통인 것처럼 포장해서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고 유혹하는 행위들을 “통합”혹은 “합력”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교회에서 공공연하게 행하고 있는 행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혹시라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속에서라도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에 돌아오는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훈련이나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라 그 영혼을 사랑하시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닐까 싶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도행전이후 2000년의 역사속에서 심리치유나 내적치유 혹은 정신치유라는 말이 없었어도 충분히 교회로서의 기능과 변화하는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셨다. 이제 막 150년의 역사를 넘긴 심리학이나 기타의 학문들이 교회 안으로 몰래 기어 들어와서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들을 노략질 하려고 하는 행위들이 기독교상담이라는 미명 아래 많이 만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