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경적상담과 기독교상담의 차이

김주원 박사1.jpg 교회사의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여러 모양으로 도전을 받아 왔다. 현대 교회사에 있어서 큰 도전이 상담분야를 타고 들어오고 있는 심리학적인 분야의 도전이라면 사실 이러한 도전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하여 심리학이나 기독교상담에 관한 경고의 글이나 비판을 가하는 것은 이들의 잘못된 시도들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하는 형제나 자매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성을 믿고 사역하는 성경적상담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있어서는 사역을 방해하는 가장 큰 대적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포장지로 사용하고 있는 [기독교상담자]들이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사역의 현장속에서 알코올중독, 마약중독, 성중독, 게임이나 도박중독 등등과 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거의 모두 다 그러한 것들은 질병의 문제라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일수록(본인들이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문제를 상담하기 위하여 [기독교상담자]나 믿음이 좋다고 하는 [기독교인 정신과 의사]에서 상담을 받은 후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질병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일반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상담자들이나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정신과의사]들이 가르쳐놓은 것을 확실히 믿고 나름대로 만든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변화를 시도하려고 했을 때에 강한 거부반응들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능력하게 무너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신념들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진정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실 변화의 기대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들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동안 가족들이 당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기에 일선 현장에서 일하는 사역자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안타깝다.

성경은 그 어떤 곳에서도 [알코올, 도박, 성중독, 오락, 마약 등등]과 같은 것들을 질병으로 분류하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단호하게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범하는 죄의 문제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독교상담]들은 이러한 문제들이 심리학의 누룩의 영향을 받아서 질병의 문제나 장애의 문제로 분류하여 말하고 상담하고 있다.

로마서6:4-7에서 바울은 우리의 죄의 상태에 대해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들이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로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가 행했던 부분들이 결코 질병의 문제나 장애의 문제들이 아니라 오히려 극심한 죄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특히 현대인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정신적인 질병이나 장애들의 거의 대부분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인간의 문제 특히 죄의 문제와 영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린도전서 6:9-11] 라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라는 선언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포장지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능력의 말씀]으로 다가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성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약속과 선언의 말씀이 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예수를 믿으면서 술을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아직 동성애자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만 어떻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위의 말씀을 분명히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분명히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라고 선언하고 계시는 말씀을 보면 얼마나 감격에 겨운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이나 극심한 죄중에 있는 사람들, 혹은 세상이 말하는 정신질병이나 마음의 내적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망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잘 인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

소망의 말씀과 회개의 말씀 보다는 징계나 책망 혹은 깊은 어두움에 관한 것들만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어주게 하고 내적치유 혹은 마음의 치유등등으로 불리우고 있는 심리학적인 태크닉의 변형인 최면술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노략질하는지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흔히들 강단에서 전파되어지고 외쳐지는 말씀들 .. “능력의 하나님,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만물을 지으시되 사람도 지으셨던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세상의 헛된 철학으로] 영혼을 죽이는 것을 먹이고 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목회자들이 전하는 말씀들 그리고 주일이나 예배시간마다 외쳐지는 자신 있고 능력 있고 확신 있는 말씀을 준비한 많은 설교 속에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만, 정작 자신에게 상담을 요청하고 있는 힘든 상황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전혀 이로울 것이 없는 심리상담가들이나 정신과의사들 혹은 기독교상담자에게 자신들에게 찾아온 소중한 생명을 맡기고 만다. 비단 맡길 뿐만 아니라 목사 스스로 자신의 양을 이리 굴속에 던져 놓고 와서는 잘되기를 기대하거나 혹은 자신이 참 일을 잘 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