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칼럼】거듭난 그리스도인, 죄가 있을까 없을까?

   대림감리교회 이인규 권사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협력상담위원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 카페 운영자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문제가 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죄가 있을까, 없을까? 이 문제로 방황하다가 심지어 이단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두 가지의 극단적인 주장을 만나게 된다.

 첫째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는 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므로 죄와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어떤 죄를 지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도덕폐기론자들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단 하나의 죄가 남아있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곧잘 율법주의적 구원관으로 가게 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죄와 관련 정통신학에선 뭐라고 하는지 살펴 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저는 아직도 이 삶과 이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몸 안에 있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소망을 가진 자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 9:27)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다시 소망을 가진 자는 수동적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저의 “땅에 있는 지체를”(골3:5) 죽입니다. 이것이 바로 논제입니다. 이 모든 진리는 주어졌고, 성령의 능력은 제 안에서 역사하시며, 저는 그것을 하도록 격려를 받으며,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했다거나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거절해야만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동일하게 반동의 원리 또한 거절해야만 합니다”(로이드존스, 성령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330쪽).

“이 회개(중생 후의 반복적인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곧 육에 속한 마음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아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웨슬레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99-200쪽).

 “죄와 죄 용서
1) 원죄에 대한 스콜라 교의의 그릇됨
2) 우리의 모든 의는 불결하다
3)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죄는 여전히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4) 선을 좇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5)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은혜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
6) 원죄(죄성)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으나 이미 죽은 것이고 죽어가고 있다.
7)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루터신학개요, 한국장로교출판사, 132-136).
 
 이신칭의를 깨달아 종교개혁자가 된 마틴 루터는 우리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거듭난 우리에게는 죄가 있는가, 아니면 죄가 없는가? 죄라는 용어는 죄책과 죄성의 두가지 개념으로 사용되어진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의 죄책은 사함을 받았지만, 우리의 죄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죄책”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법적 책임”을 가리키는데, 좀더 분석하면, 그것은 첫째로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과 둘째로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포괄한다. 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죄책이다.

 또 죄성(오염, 부패성)이란, 죄인이 가지고 있는 죄악된 성질(죄성, 罪性), 죄를 향한 경향성 혹은 연약성을 가리킨다.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의 전가뿐이 아니라, 또한 그 범죄로 인한 인성의 부패성이 모든 인류에게 전달되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다윗은 내가“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곧 죄성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엡 2:4)라고 말하고 있으며, 성경은 많은 곳에서 부패와 오염된 죄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으며,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 스스로 죄를 끊을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 행위구원론이라는 이단으로 불리는 이유는 곧 그들이 십자가 예수 대속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과거와 현재와 장래의 모든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죄책”에 대해서 면책되어짐을 뜻한다. 즉 믿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노라”(롬 8:1).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이미 온전한 의인이 되었으므로 죄성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도 극단적인 주장이며, 우리가 모든 죄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끊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도 극단적인 주장이 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믿음 안에서 의롭다고 칭하신다는 것은 죄책을 면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자(요일 2:1)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제부터는 죄(죄성)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위 성경본문은 회개와 자백을 구별하는 용어적인 의미가 아니며,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진리가 그 안에 없다는 뜻이다. 즉 거듭난 우리는 신분상 의인이 되었지만,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죄책에서 면제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끊어야만 그 조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죄를 짓지 않아야만 한다. 그것이 곧 예수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교회와신앙 & JTN방송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