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치료의 혁명적 방법? / 웃음치료의 3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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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은 병을 치료하는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외형적 마음이다. 한 인간이 자기 속에 있는 깊은 것을 외부에 알리는데 두 가지 요소로 설명 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 내면에 있는 생각으로 설명 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인간의 얼굴(얼꼴)을 통해 나타나는 외면적 형상으로 표현 할 수 있다. 인간 속에 있는 것을 마음이라고 말한다면 그 마음을 밖으로 드러낸다고 하는 측면에서 표현되는 웃음을 외면적 마음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기쁘면 얼굴표정에 감격의 웃음이 표현되고 마음이 평안하면 잔잔한 평안의 미소가 표현되고 정말 웃기는 일을 보면 한바탕 크게 웃는 표현이 소리와 얼굴, 온 몸의 동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반대 현상으로 조롱 섞인 비웃음이 있는가 하면 업신여김의 조소가 있고 어이없을 때 나타내는 허탈한 표현도 웃음이라 말하는 것을 본다.

이 외에도 웃음 전문가?(웃음 전문가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말하니 그렇게 그냥 부르기로 한다.)들은 더 많은 웃음들을 알려주고 있지만 지면이 아까워 생략하고, 요즘 한 창 유행하고 있는 웃음 치료라는 것이 진정 한 인간의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것과 설령 몇 몇의 사람들에게 조금 도움이 된다고 해도 그 용어나 방법이 합당한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성경을 절대 삶의 기준으로 생명처럼 여기고 사는 기독교 목사로서 내 개인적으로는 웃음치료라는 것을 논하기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지만 훌륭한 신학교 교수들과 사회복지학 박사, 또는 큰 교회에서 내적치료, 또는 전인치료라는 명분하에 한 인간의 전인을 치료하는데 웃음치료가 가히 혁명적이라는 단어까지 쓰고 있음에야 외인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직 분별력이 부족한 교중사람들을 위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웃음치료를 가히 전인치유의 혁명이라고 극상으로 칭찬하는 분들의 주장을 보면 웃음치료의 3대 핵심적 원칙이 1. 그냥 크게 웃어라. 2. 그냥 길게 웃어라. 3. 그냥 배꼽이 춤추도록 웃어라. 인데 여기에 쓰인 “그냥”이라는 단어가 ‘ 아무 일도 없는데’ ‘무조건’ ‘억지로라도’라는 의미라면 웃음치료는 법적으로라도 금지시켜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심오한 인간의 삶을 광대의 삶으로 형편없이 질적으로 낮추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정신병원을 수도 없이 개원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그냥”이라는 단어를 너무 졸속하게 물고 늘어져 “크게, 길게, 배꼽이 춤추도록 웃어라”는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는 조금 수준이 나은 분들을 위해 나도 조금 나은 수준에서 말하겠다.

치료라고 하는 것은 항상 부조화적, 또는 부정적 환경과 상태를 전제한다. 개인의 질병에서부터 인간관계의 악화, 그리고 환경적 열악성까지도 치료라고 하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요건들이다. (물론 종교적인 입장에서 죄를 다루는 것도 포함한다.)

그래서 이런 포괄적인 부조화 문제를 치료하는데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데 에 있어서 “전인치료”라는 말로 표현하고 전인의 중심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 “내적치료”라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인치료”에 대한 혁명적인 방법이 그냥 크게 길게 몸부림치며(배꼽이 춤추도록)웃으면 된다는 것이다.

억지웃음은 절대로 웃음이 아니다. 옆구리를 간질어서 웃는 웃음은 고문이기 때문에 웃다가 화를 내는 것이다.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고 웃음이 아니다. 그것은 웃음을 가장한 분노의 표시오 길게 옆구리가 아플 정도로 억지로 웃는 것은 인간고뇌에 대한 속수무책의 절규인 것이다. 미웁고 죽이고 싶은 감정을 하늘을 보고 박장대소 하며 참는다고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비겁하고 문제를 돌파하지 못하는 비굴한 사람들이 만드는 자기 위선적 행동일 뿐이다. 이런 억지웃음보다는 광대들이 하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보고 웃는 것이 한 수 위다. 아니면 조금 내용 있는 코미디를 보고 웃는 것이 더 한 수 위일 수 있다.

그러나 어릿광대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병이 고쳐졌다든지 코미디를 보고 인간 문제가 회복되었다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인간의 고뇌와 아픔의 문제들은 억지 웃음을 기획하고 훈련시켜 그 겉모습을 보고 배꼽이 빠지도록 웃게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처음부터 코미디보다 더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는 억지웃음, 훈련 웃음이 전인을 어찌 치료한다는 말인가?

전인치료는 전인격적 치료를 말할 것이다. 나는 단어조차도 좋아 하지 않지만 그들 말대로 영성치료, 내적치료 같은 영적, 전인격적 치료의 범주라면 더 더욱 억지로 웃게 해서나 웃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큰 복을 받고 그것을 누리면 자동으로 나타나게 하신 표현으로서의 웃음을 절대 억지로 웃게 해선 안 된다.

원래 가진 복으로서의 웃음을 상실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고(나는 그것을 죄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그 인간 고뇌의 원천적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원리) 그리고 그것을 믿고 복종(하나님의 말씀)하는 일 만이 전인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고 원래적 복의 웃음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교육해야 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세상 철학과 인간분석심리과학에서 시작한 웃음치료 미술치료 등등과 같은 것들을 바르게 신학을 하고 절대적, 성경적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은 인본주의적 기술은 될지 몰라도 기독교의 성경적 주장은 분명코 아니다.

그러므로 작금의 유행성 웃음치료, 다시 말해 조건 없이, 그냥, 크게, 길게, 몸부림쳐, 억지로 웃게 하는 것은 “웃음”이라는 본래적 고귀한 의미를 모욕하는 것이므로 “전인치료 등의 혁명적 치료 방법”이라는 말로 분별력 없는 사람들을 놀리지 말고 그냥 “웃음 장난, 또는 그냥 웃음놀이” 라고 말해야 한다.

진정한 웃음은 사죄의 확신과 천국의 소망과 소금과 빛의 삶속에서 인간 상호 사랑 안에서 환하게 때론 잔잔하게 행복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