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살리는 교회 경남 고성군 선한이웃교회


  ▲ 중국어 수업 시간. 공부하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하나 없지만 아무도 딴짓하지 않는다.

 2시 40분, 영오초등학교에 주황색 선한이웃지역아동센터(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차가 나타나자 멀리서부터 아이들이 뛰어왔다. 차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들은 강석효 목사(선한이웃교회 담임·선한이웃지역아동센터 원장)를 보자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어린이날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모인 자치 회의에서도 자기 의사를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 5월 5일 무엇을 할 것인지부터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 것인지까지 모두 스스로 결정했다. 강 목사는 사회자였다. 아이들은 무엇을 하든 주인 행세를 했다. 결손 가정 아이들도 있다고 했는데, 표정·행동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었다.

강석효 목사로부터 교회 역사를 들으니 아이들의 주인 행세가 이해 갔다. 아이들은 교회와 아동센터의 진짜 주인이었다.

11년 전 선한이웃교회(당시 영오감리교회)는 문 닫은 교회였다. 전임자가 교회를 떠난 지 오래였다. 교인도 없고 예배도 없었다. 1999년 강석효 목사 부부가 부임해 거미줄을 떼고 교회에 걸린 빗장을 풀었을 때 "여기 우리 교회인데. 우리 여기 교회 다녔어요" 하며 네 명의 초등학생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 모두가 떠난 교회를 아이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강석효 목사는 이 아이들 넷과 교회를 시작했다.

교회는 아이들과 함께 자랐다. 초등학생, 중학생이었지만 교인도 늘었다. 교회에 나오는 어른들은 몇 없었지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른의 빈자리는 아이들이 메웠다. 중학생이 되면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 밥 먹은 그릇 설거지도 아이들의 몫이었다. 주일 예배 성가대, 대표 기도, 청소까지 교회 일에 아이들 손이 닿지 않는 것이 없었다. 타지로 학교 간 아이들도 일요일에는 예배하러 왔다.

아이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초창기, 초등학교 때는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며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 힘 빠지는 일이었다. 목회의 한계인가 고민했다. 그러다 병주를 만났다.

 아이들이 바뀌다
 강석효 목사는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독거노인을 살피다 병주의 가정 형편을 알게 됐다. 병주는 아버지 없이 암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살던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었다. 영오에서 손버릇 나쁜 아이로 소문나 있었다. 강 목사는 병주가 너무 안타까워 병주 집을 방문하여 살림살이를 살폈다.

관심을 보이는 어른이 생기자 병주는 변했다. 손버릇도 고쳤다. 공부하고 싶다며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했다. 공부라면 끝에서 2등 하던 아이가 앞에서 2등을 했다. 강 목사는 병주가 치유되어 바르게 잘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행복 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시골 목회자로 보내셨는지, 목회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병주 같은 결손 가정 아이뿐 아니라 영오 지역 아이 대부분이 돌봄의 손길이 필요했다. 영오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는다. 땀을 흘린 만큼 소출을 내는 땅으로부터 아이들을 키울 만큼 작물을 거두려면 어른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한 일이었지만 아이들은 방치됐다. 시골이라 집이 띄엄띄엄 있어 아이들끼리 모여 놀기도 쉽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도 소외되었다.

 강석효 목사는 아이들을 위해 지역아동센터를 시작했다. 부모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봤고 필요를 채워 줬다. 바쁜 부모 대신 함께 공부하고, 목욕하고, 놀았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낯선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싶었던 강 목사는 진주에 있는 경상대 교수에게 문화로부터 소외된 시골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달라며 무작정 편지를 썼다. 다행히 긍정적 대답이 왔다. 바이올린을 싸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줬고 레슨할 제자를 소개해 줬다. 물론 진주부터 영오까지 바이올린 선생님을 데려오는 것은 강 목사와 부인 이현정 씨(37) 몫이었지만 아이들이 좋아할 걸 생각하니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영오 지역은 너무 외진 곳이라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진주로 나가야 하는데, 형편이 어려워 집을 구할 수 없는 여자 아이들을 위해서 학사관을 마련했다. 우양사회복지재단 등 이곳저곳에 도움을 구한 결과였다. 남자 아이들은 하숙비를 지원해 줄 수 있는 후원자들을 연결해 줬다.

 주민들 시선이 바뀌다
 병주처럼 다른 아이들도 지역아동센터와 교회를 나오며 변했다. 어른들 사이에 선한이웃교회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착하고 공부 잘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회에 가면 아이들이 사람 된다 했다. 아이들이 교회나, 교회에서 하는 아동센터를 나가는 것을 반대하던 어른들이 아이들을 아동센터에 보내기 시작했다. 교회 다니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아이를 따라 교회에 나오는 부모들도 생겼다. 강 목사 부임 후 교회에 나온 첫 어른도 학부모였다.

이경주 씨(43)도 딸 수연(18)이가 바이올린을 배우기 위해 아동센터에 나간다고 했을 때 탐탁지 않았다. 바이올린을 배워 무엇에 쓰나 싶었다. 하지만 수연이가 아동센터를 다니고 교회를 다니며 모범적으로 학교생활을 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바뀌었다. 2년 전부터는 교회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인연으로 지금은 아동센터에서 생활 지도 교사를 하고 있다.

아이들로 인해 교회와 아동센터에 대한 인식이 바뀐 사람은 이경주 씨뿐이 아니다. 오랫동안 불교 영향을 받은 주민들에게 교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다른 문화였다. 영오면 인근에는 옥천사라는 큰 절이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 절은 1000년 넘게 자리를 지켜 왔다. 100년도 안 된 교회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변하자 주민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교회 일에도 관심을 보였다.

 교회 이름이 바뀌다 
 지금 건물에 아동센터가 자리 잡는 것도 주민들의 도움 덕이다. 전에 있던 건물은 너무 낡아 비와 바람이 샜다. 아동센터를 하며 아이들에게 쾌적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선 이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교회에는 돈이 없었다. 전세금도 집주인이 너무 가난해 되돌려 받을 수 없었다. 이런 교회 사정을 안 사람들이 하나 둘 후원했다. 외국에서 돈을 보내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주민들도 십시일반으로 후원해 줬다. 큰 교회의 도움은 전혀 없었다. 이사하고 교회 이름을 영오감리교회에서 선한이웃교회로 바꿨다. 선한 이웃들이 도와줘서 이전할 수 있었다는 의미와 교회도 선한 이웃이 되자는 마음을 담았다.

 선한이웃아동센터에 다니는 아이들은 공부 잘하고 모범적인 것으로 소문났지만 정작 아동센터에서는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맘껏 놀아야 철든다는 것이 강석효 목사의 아동센터 운영 철학이다. 교육 과정은 대부분 아이들이 시골에 살며 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도록 꾸려졌다. 바이올린, 중국어, 클레이아트(점토 공예), 천문학, 역사, 피아노 수업 등 학교 공부와 직접 관련 없는 것이 많다. 쉬는 날이면 아이들과 박물관으로 도시로 체험 학습을 간다. 진주에 있는 박물관은 너무 자주 가 특별 기획전이 열릴 때마다 박물관에서 아이들을 무료로 초대해 준다. 매주 토요일 함께하는 등산과 목욕도 아주 중요하다.

아이들이 아동센터에 오면 학습지를 두 장이나 세 장을 풀지만, 풀지 않는다고 해서 혼내는 사람은 없다. 문제집을 풀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 문제집을 푼다.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자신의 흥미와 특기에 따라 배우고 싶은 것을 선택한다. 피아노에 흥미 있는 아이들은 피아노를 배운다. 중국어를 배우고 싶은 아이는 중국어를 배운다. 강석효 목사는 아이들이 선택한 것을 끈기 있게 해 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믿어줄 뿐이다.

아이들에 대한 강 목사의 믿음은 절대적이다. 아동센터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을 데려다 주는데 아이들이 많아 한 차로 갈 수 없어 피아노 수업을 하던 여자 친구들과 영빈(12)이가 남았다. 강 목사는 영빈이에게 기다리는 동안 컴퓨터 게임을 하지 말라고 했다. 아이들을 데려다 주며 강 목사에게 "영빈이가 정말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다. 강 목사는 하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40분 뒤 아동센터에 남아 있던 아이들을 데려다 주러 가는 길에 영빈이에게 기다리면서 무얼 했는지 물었다. 영빈이는 스타크래프트 책을 봤다고 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게임 책을 보며 게임 하고 싶은 마음을 달랜 것이다. 강석효 목사가 맞았다.

 "장례 걱정 마이소"
 강석효 목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아침 9시가 되면 집을 나선다. 혼자 사는 할머니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영오면 주민 중 노인 비율은 20%가 넘는데, 대부분 혼자 된 할머니들이다. 자식들을 도시로 떠나보내고 혼자 사는 할머니들에겐 살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할머니 집에 방문하면 집안 구석구석을 살핀다. 손볼 곳은 없는지, 냉장고에 반찬은 있는지, 밥 먹은 흔적은 있는지 확인한다. 이렇게 살펴야 다음에 할머니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올 수 있다. 과일이 없으면 과일을, 쌀이 없으면 쌀을 가져온다. 반찬 봉사를 하는 사람과 연결해 주거나 집을 수리해 주는 단체를 소개해 주기도 한다.

그리곤 할머니 곁에 털썩 앉아 백 번도 더 들은 이야기를 듣는다. 할머니들에게는 말벗이 되어 주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기자와 함께 방문한 날도 김말임 할머니(88)는 속아서 결혼한 이야기, 할아버지가 애먹인 이야기, 시부모 병시중을 23년이나 한 이야기, 둘째 아들이 돈 벌어 마을에서 제일 먼저 슬레이트 지붕을 해 준 이야기를 처음 하는 것인 양 늘어놓았다. 강 목사는 처음 듣는 것인 양 "그랬습니꺼" 하며 맞장구친다.

정연순 할머니(85)도 강석효 목사가 "할머니" 하며 집에 들어서자마자 먹던 사과, 뻥튀기를 내놓고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오늘도 병원에 다녀왔다며 약 봉지를 보여 주는 할머니에게 "약이 이래 많으니 아프면 병원 가지 말고 할머니 집에 와야 겠네예" 너스레를 떨면서도, 대상포진은 낳았는지, 관절은 괜찮은지 꼼꼼히 살핀다.

할머니들과의 이야기는 사는 것으로 시작해 죽는 것으로 끝난다. 이날도 그랬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은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을까 걱정이다. 자식들과 연락이 잘 닿지 않는 할머니들은 더 그렇다. 그래서 강 목사는 할머니들을 만날 때 마다 꼭 말한다. "장례 걱정은 마이소. 내가 염도 해 주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줄 게예. 제사 걱정도 하지 마소. 할머니 기억하며 내가 예배할 게예." 할머니들은 못 들은 척했지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뉴스앤조이 김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