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아름다움.jpg 마21:1∼11
  2010년 3월28일 우리 종려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행적 중 삼분의 일이 주님의 수난에 관한 기사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의 수난사(受難史)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제 주께서 마지막 한 주간의 구속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가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주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또한 그 날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명명하고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 주님은 벳바게에서 제자들에게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맞은 편 마을에서 아직 한 번도 사람이 타 본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끌고 오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무어라고 하면 '주께서 쓰신다'라고 말하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왕으로서의 명령이었고 나귀를 무조건 요구하신 것은 주님 자신이 만물의 주인이 되심을 표시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새끼 나귀를 타시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시며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셨는데 주님이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치면서 왕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주님은 이런 일을 금하셨을 터인데 이번에는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주님이 유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금하지 않고 자신이 바로 왕이심을 인정하시면서 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행동이 매우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이 왕적 능력과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라면 나귀보다 훨씬 품위 있는 짐승을 타고 위세 당당하게 입성하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왕의 공적인 행차치고는 매우 초라하고 오히려 우습기조차 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로마 총독부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자신이 왕이심을 인정하시면서 이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을까요? 주께서 이런 모습으로 입성하는 것은 구약의 예언을 이루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네게 올 왕이 겸손하여 나귀와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고 오신다(슥9:9)" 주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주님의 사역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미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대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왕 메시야는 겸손하여 새끼 나귀를 타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이제 구원자로서의 사역을 완성하는 시점에서 주님은 그 구원사역의 본질을 다시한번 분명하게 드러내셔야 할 것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메시야 사역은 그 출생부터 겸손으로 일관되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왕이셨기에 그 사실을 드러내야 하셨지만 그는 세상의 왕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의 모습으로 우리가운데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섬기기 위해서 오신 겸손하신 왕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 임금처럼 천리준마를 타고 약자를 짓밟으며 예루살렘을 점령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멍에를 지시기 위한 일이기에 겸손의 상징인 나귀를 타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어미가 아닌 새끼를 타셨고 번쩍이는 완장이 아니라 겉옷을 걸치고, 떨며 머리 숙이는 백성들 앞을 도도히 행진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겉옷과 나뭇가지를 펴드리는 그 위를 겸손하게 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겸손하셨던 것처럼 그의 타신 짐승도 어리고 어린 나귀 새끼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위에서 왕의 사신이 되어 왕의 사역을 대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그 분의 겸손의 원리로 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충성스런 사신이 아닙니다. 높아지기를 서로 경쟁적으로 원했던 제자들은 얼마동안 주님의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까닭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한 동안 헛된 짓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겸손하신 왕 주님을 본받는 종들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종려주일에 주님을 태워드린 이 나귀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나귀는 연약한 몸으로 주님을 태워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대개 말처럼 씩씩하고 힘센 자를 쓰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제 힘을 자랑하니까요. 물론 말처럼 힘센 자도 쓰임을 받을 수 있으나 그 정신은 어린 나귀처럼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나귀처럼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심을 명심합시다. 또한 이 나귀는 주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걸어갔습니다. 이 나귀도 제 갈 길을 가고 싶은 곳이 있었겠지만 새 주인이신 주님의 지시에 따라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오늘 우리도 나귀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짊어지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묵묵히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나귀는 주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실 제일 수고한 자는 나귀였습니다. 고생은 나귀가 하고 기분은 제자들이 다 냈습니다. 이처럼 책임은 내가 지고 공로는 이웃에게 돌리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립시다. 하루는 나무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회의의 의제는 '이제는 우리도 왕을 모시고 잘 살아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들은 먼저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감람나무는 "감람유를 생산하여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주어야하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라고 사양했습니다. 그 다음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는데 포도나무 역시 "좋은 열매를 맺기 바빠서 왕 노릇을 할 수 없다"라고 거절했습니다.

무화과나무에게도 왕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무화과나무 역시 꼭 같은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고민 끝에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더니 가시나무는 쾌히 수락하면서 "이제 난 너희들의 왕이다 앞으로 내 명령을 듣지 않은 자들은 이 가시로 사정없이 찌를 것이다"라고 소리를 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혹시 우리 주님을 잘못 알고서 가시나무왕 노릇을 하려고 덤벼들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봅시다. 우리 주님은 가장 겸손한 왕이신데 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 주님은 당신의 몸된 교회를 우리로 짊어지고 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힘자랑하다가 주님을 땅 바닥에 내동이치지 않았습니까? 내가 영광을 받고자 하지 않았던가요? 직무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종려 주일의 나귀처럼 주께 꼭 필요한 일꾼들이 됩시다. 주님을 편안히 목적지까지 불평하지 않고 자기 자랑하지 않고 잘 모셔드리는 신실한 나귀와 같은 자들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겸손하신 만왕의 왕을 참으로 겸손하게 잘 모시는 일꾼들이 됩시다. 겸손과 능력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자는 능력이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은 겸손한 법입니다. 다만 약간 덜 익은 자들이 오만을 부리고 주위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 주님이 허락하시는 참 능력을 받아 이를 온전히 발휘하기에 어느 누가 봐도 주님처럼 겸손한 자들로 비춰질 수 있기 바랍니다.

                                                                                                                                  (2010. 3. 28. 종려주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