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충신교회)

 고전 15장은 바울의 유명한 부활신앙의 고백이며 증언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1-34절은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35-49절은 부활한 몸의 성격에 대하여 50-58절은 부활과 승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증거합니다.
1:3절을 보면 "성경대로 죽으시고" 1:4절을 보면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사 53장과 단 9:26과 시편 22편과 스가랴 12:10등에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 역시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셋째,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눅24:33-39).
 넷째,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습니다.
 다섯째,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여섯째, 모든 사람에게 보이셨습니다.
 일곱째, 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게다가 고전 15:14-15을 보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믿음은 헛것이며 훗날 거짓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 또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종교이며 나도 다시 산다는 개인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이 바로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불교, 유교, 도교, 회교, 힌두교 등 그 어느 종교도 교주가 다시 살아났다는 교리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기독교가 죽은 종교가 아니라 산 종교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세 가지를 교훈합니다.
 1.성스러운 영의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51절을 보면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더니"라고 했고, 52절을 보면 "우리도 변화하니라"고 했습니다. 부활체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변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힘도 쇠하고 허리도 굽어지고 눈도 침침해지고 얼굴도 주름투성이로 변합니다.

 곱고 깨끗하던 피부도 거칠어지고 주근깨며 검버섯이 피어납니다. 꾀꼬리 소리나 은방울 굴리던 소리 같던 목소리도 쉬고 굵은 소리로 변합니다. 하지만 부활하니 몸은 거룩한 몸으로 변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일본 나고야 대학의 연구팀이 사람과 같은 혈액형을 가진 돼지를 사육하는데 성공했다고 벌써 몇 년이 지나갔습니다만 교도통신은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나고야 대학연구팀은 사람의 피를 생성하는 효소 유전자를 수정된 돼지의 난소에 주입시킨 뒤 수정란을 19마리의 암돼지 자궁에 이식했는데 그 중 3마리가 낳은 27마리의 돼지 새끼 가운데 1마리가 사람과 동일한 특성을 지닌 피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와 같은 특성을 지닌 돼지를 사육하려면 앞으로 10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 피와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돼지는 돼지 일뿐 그것이 사람 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해서 사람 몸에 수혈이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저로서는 제 몸속에 돼지피를 넣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피는 생명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사람생명 속에 돼지 생명을 혼합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의 피가 정맥과 동맥을 순환하고 있는데도 돼지만도 못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물며 돼지 피가 사람의 혈관을 흐른다면 돼지처럼 꽥꽥거리고 낄낄거리고 온통 세상이 돼지우리가 될까봐 겁이 납니다. 사람 몸속에 사람의 피를 수혈하면 생명을 구하거나 연장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피로 씻음을 받은 사람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51절과 52절은 변화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식간에 홀연히 변한다"는 것이고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순간 영적인 몸으로 부활합니다. 성스러운 몸이란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는 몸을 의미합니다. 영의 속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서서히 몇십년 걸려 진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합니다. 상처 후 재혼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 요청한 상담의 내용은 훗날 천당 가면 부인이 둘이 될텐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마태복음 22:30말씀을 소개했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한 몸으로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축복된 것입니다.

  2.이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55절을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고 57절을 보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김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40일동안 금식하신 후 마귀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유대 교권자들과 지도자들의 도전을 이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영적싸움에 이기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죄와 유혹을 이기셨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이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승리의 축복을 주십니다.

   사람의 몸에는 지구상에 사는 사람 수만큼의 온갖 세균이 기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안 거실에는 60만개의 곰팡이가 기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심코 피우는 담배한대 속에서 4천여 가지의 화학성분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온갖 질병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만 그때그때 생성되는 강한 저항력 때문에 그것들을 막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항력이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받아야 죄도 이기고 시험도 이기고 유혹도 이기고 마귀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를 이기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세상법의 경우에서도 드러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든지 죄가 없다고 강변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사람은 스스로 자기 의를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경우를 보면 짐승을 죽여 그대로 그 피를 제물로 드림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림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공로를 믿는 사람은 죄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죽음을 이기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요 11:25-26을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이기게 해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예수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이며 핵심진리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신앙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삽니다.

  3.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58절은 고린도전서 15장의 결론이며 부활장의 마무리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
 나이가 들면 손바닥이나 몸이 떨립니다. 그것은 몸의 기능이나 힘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부활신앙이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죽을까봐 떨고 망할까봐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만 확실하면 떨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35을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했고,

  8:38-39을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그 어떤 내적 갈등이나 외적 억압이나 영향에도 자기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고백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시 사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데 죽음이 겁날리 없고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님이 계시는데 걱정될 리 없고, 우겨싸임을 받고 핍박을 받아도 힘주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도 그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집이 흔들리면 무너집니다. 나무가 흔들리면 뿌리가 뽑힙니다. 신앙이 흔들리면 그 영혼이 침몰합니다.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맙시다.

  (2)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두 가지 사건 때문에 힘을 얻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힘써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할 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따르고 좇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이 났다면 충성을 바쳐 따르고 섬길 대상이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예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순간으로 끝났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감격과 충성의 대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1914년 당시 정동교회는 미화로 200달러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은 1893년에 시작한 교회 건축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은 빚을 갚기 위해 헌금을 하자고 했지만 그날 걷힌 헌금은 5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이화학당 학생이 많았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치기로 의논하고 주일저녁 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데'찬송을 부른 후 한사람씩 나와 가진 것을 바쳤습니다.
 
 동전 17달러 정도, 반지 35개, 손거울, 자명종 2개, 양말, 내의, 구두, 혼수감으로 어머니가 주신 붉은 명주도 있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댕기머리를 잘라서 주님께 드린다며 내어 놓았습니다. 그날 그 교회의 빚은 해결되었습니다. 빚 바랜 이화여대 학생들의 요즘 세태에 비기면 고전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누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쓸 수 있습니까?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가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라서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한평생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교회 섬기고 직분 감당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 주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