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사람들
 눅 24장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3-35절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신앙을 회복한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두 제자의 행보 속에서 몇 가지 산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두 제자의 잘못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제자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열두 사도 중의 두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고 모셨던 사람들이었음에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 두 사람의 행보는 다음과 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오늘 나의 잘못인 것입니다.

(1) 삶의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일하던 곳,다른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날에"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부활하신 그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조급하게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방관주의, 회피주의, 도피주의 입니다. 방관은 무관심이고, 회피는 편의주의이며, 도피는 적극적 외면이며 부인입니다. 세 가지 다 나쁜 것입니다. 가령 두 제자가 한달 정도 예루살렘에서 고통받아가 떠났다면 이해가 가능합니다만 그러나 그날 더우기 부활의 소식이 퍼져나가고 있는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제아무리 미화하고 호평을 한다 해도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습니다.

 현대 크리스챤의 특징은 방관자, 회피자, 도피자라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내밀고, 불리하면 움츠리는데 익숙합니다. 떠나면 안 됩니다. 부활의 현장인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떠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떠나면 안 됩니다.

  (2)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저희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뇌에 충격을 받거나 손상을 입으면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는 사흘 전까지 곁에 있었던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비극입니다. '눈이 가리워졌다'는 것은 영적인 것 거룩한 세계를 보는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안과 의사들은 사람 눈에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 수십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질환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질환 가운데 가장 큰 질환은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겐 네 개의 눈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사물을 보는 눈입니다. 산을 보고, 사람을 보고, 하늘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눈이 대기오염과 텔레비젼 시청 등 물리적인 원인에 의해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둘은 이웃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정신의 눈이며, 연민의 눈이며, 사랑의 눈입니다. 그런데 이 눈도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웃은 보이지 않고 나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웃은 보이지 않고 나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 가고 있고, 좋은 점은 보이지 않고 허물만 약점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셋은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인간의 눈 자체의 가시거리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천리안이라는 말이 있긴 합니다만 천리를 보는 눈은 없습니다. 그러나 보조 장치를 이용하면 아메바도 볼 수 있고 월세계도 볼 수 있고, 사람의 위장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겐 세계를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세계란 넓고, 크고, 깁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통합하고, 이해하는 것이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눈은 좁고 침침합니다. 나 밖에 모르고 우리 밖에 모릅니다.

  그 전에 모 방송국 TV에서 방영하는 토크쇼를 진행하는 사회자는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세계화가 한창 강조되고 있습니다만 한국 사람에 세계화 되는 것이 빠를럴지, 세계를 한국화 하는 것이 빠를지 얘기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세계화 수용 태세가 덜 됐다는 뜻도 될 것이다. 세계를 보고 역사를 보고 미래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넷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믿음이라는 보조 수단이 없는한 보이지 않는 눈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하소서 성령이여"아멘 그런데 현대인은 그 눈이 점점 어두워가고 있습니다.

  중세기는 천주교의 교리와 성물숭배가 믿음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그때를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21세기는 인간의 지식과 과학문명이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영적 암흑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두 제자의 경우 영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곁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3)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길 가면서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풀어주는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네 가지 단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듣는 것이고, 둘째는 느끼는 것이고, 셋째는 깨닫는 것이고, 넷째는 실천하는 것입니다. 듣긴 듣는데 느낌이 없다든지 느끼긴 하지만 깨달음이 없다든지 깨닫긴 했는데 실천이 없다면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제자가 말씀을 깨닫지 못한 원인을 25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의미합니다. 그 예언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신약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무엇이나 잘 믿습니다. 그러나 안 믿고 의심하는데 길들여진 사람은 무엇이나 안 믿고 믿지 못합니다.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셔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남의 이야기처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 자신의 부활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마치남의 이야기처럼 했습니다. 어떤 주간지를 보니까 요즈음 대구에는 "카더라"통신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유언비어를 말하는데, "..했다 카더라.. 아니라 카더라...한다 카더라"식의 유행어가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유행어여도 안 되고 유언비어여도 안 됩니다.

 만일 두 제자가 부활신앙이 확실했더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다시사신 예수를 만나진 못했지만 그 분은 반드시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우리나라 속담에 "남의 얘기하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나 처자를 그리고 남편을 남처럼 여기거나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남처럼 여기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내가 다니고 은혜 받는 내 교회를 남의 교회처럼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2. 두 제자의 변화를 살펴봅시다.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 놀랍고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1) 시각이 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밝아진 눈으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밝아지면 예수가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영원한 세계가 보입니다. 반대로 죄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 것들이 보입니다. 쾌락이 보이고, 죄짓는 법이 보이고, 불의한 길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제자의 눈이 언제 어떻게 밝아졌느냐하는 것입니다.

  30절을 보면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라고 했고, 31절을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격의 없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은 영적인 눈이 밝아지고 영의 마음이 열리는 법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과 교제하고 먹고 마시면 금방 악을 본뜨게 됩니다. 내가 영적인 거룩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려면 그 분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즉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심령이 변했습니다.
 32절을 보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성령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날 거기서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난후 그들의 모든 것은 변했습니다. 냉소적인 신앙이 불처럼 뜨거운 신앙으로, 침체되었던 신앙이 되살아나는 신앙으로 탈진했던 신앙이 활기찬 신앙으로, 의심하던 신앙이 확신하는 신앙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언제 뜨거워졌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라고 32절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길에서 말씀 듣고 성경말씀 듣다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말씀들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 요지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 듣는 도중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고넬료를 비롯하여 가족들이 방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말씀과 성령의 깊은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와 운동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도 발견되게 됩니다. 말씀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취급하는 성령운동은 잘못 탈선할 위험이 많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가 그날 들었던 그 말씀은 바로 성경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날 두 제자는 예수님 말씀 듣고 성령 받았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변했습니다.

  (3) 행동이 변했습니다.
33절을 보면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행동 없는 변화는 참 변화가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신줄 알고 그리고 마음이 뜨거워진 뒤에도 그냥 엠마오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이야말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곧 그 시"는 "바로 그 때"라는 뜻입니다. 29절을 보면 그때는 이미 저물었을 때입니다.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려면 12km나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이나 아니면 2-3일 흐른 뒤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 때 되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결단입니다. 믿음이 떨어지면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회복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참 회개는 즉시 해야 합니다. 미룰 필요도 없고 늦출 필요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던 그들이 곧 그 시로 돌아온 것은 회개의 신속성을 의미합니다. 떠났던 예루살렘으로! 떠났던 하나님께로! 떠났던 믿음에로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한때 가수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을 불러 한국과 일본에서 수십만 장의 디스크 판매고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와야 할 곳은 부산항이 아닙니다. 부활의 신앙의 현장, 선교현장, 사명의 현장입니다. 그들은 돌아와 길에서 만난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그 일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36절 이하를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