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윤실은‘운동’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운동’이라는 용어가 우리사회에서 다양하게 쓰이지만 시민운동의‘운동’은 사회적으로 일정한 영향력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다수가 한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나가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운동'에서는 방향이 매우 중요할 것인데 기윤실은 기독교적 윤리에 뿌리를 둔 운동이기 때문에 그 방향성이 자연스레 인간의 죄성에 거스르는 정직, 검소, 절제를 강조하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면에서 기독교적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운동이었습니다.

출범 당시인 1980년대 후반기는 경제적인 성장에 따르지 못한 사회윤리적 취약성 때문에 사회 전체가 총체적 부패로 앓던 때였고, 교회도 양적 성장에 걸맞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이원론적 신앙, 기복신앙으로 널리 알려진 부정부패 사건의 핵심인물이 기독교인들로 드러나는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윤실은 정직, 검소, 절제를 덕목으로 하여 운동차원에서 검소한 교회장식, 작은 차타기, 교사들의 촌지추방, 정직한 납세, 검소한 결혼문화, 음란 문화에 대한 대치 등을 상당기간 이끌어 왔고, 그것이 여러 경로를 통하여 개인과 교회 사회에 영향력을 미쳐왔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결혼과 변호사로서의 시작이 거의 기윤실 출범 무렵이었는데, 자연히 위와 같은 운동들은 개인, 가정생활과 직업윤리에 매우 실질적인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집마련, 차구입 등 큰일뿐만 아니라 옷이나 여러 가지 소비, 그 후 아이들 교육 등에 있어서도 저나 아내가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이 기윤실에서 논의하는 기준에 비추어 괜챦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실 운영에서도 세금이나, 고객 관계에서부터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윤리 기준이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보면서 다른 사람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결국 이러한 윤리 실천 운동은 장기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가 사회 모든 영역에 미친다는 것이 진리라면 정직, 검소, 절제의 덕목은 장기적으로는 통치권적 구속력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윤실 운동의 영향력은 더욱 확신할만 합니다.

그 후로 여러 가지 사회적 필요나 내부적 여건의 변화로 기윤실의 사역 자체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되돌아보니 그냥 처음의 정직, 검소, 절제에 끝까지 매달려서 달려왔더라도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운동은 뚜렷한 한 방향으로 끝까지 단순하게 갈 때 더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뚜렷한 방향성, 지속성, 단순성 이런 것들이‘운동'에서는 장기적으로는 힘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고위공직자들 위장전입 파문이 있었고 이것이 기윤실의 정직운동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이기에 기윤실에서 나부터 위장전입하지 않기 서명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만 우리 사회에서는 벌써 이 이슈는 묻혀진 것 같습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직 문제에 대하여 윤리적 감수성이 거의 말라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 동안 기윤실이 정직 문제를 최우선하여 끝까지 들고 나왔더라면 정직의 문제에서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감수성이 좀 더 개선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현재의 우리 사회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오지 않았을까하는 미련도 가져봅니다.

지난 수년간 기윤실 사역에서‘정직’보다‘신뢰’를 더 우선하거나 병렬로 내세운 점에 대하여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정직은 그것이 자기에게나 남에게나 주는 부담이 너무 분명하여 불편하고 공격적인 단어인 반면에 신뢰는 좀 더 복합적이고 완만한 단어이기에 운동성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삼성이나 다른 큰 기업이 흔히 스스로 신뢰받는 기업이라고는 내세우지만 정직한 기업이라고는 잘 내세우지 않는데 이는 정직은 자기 스스로를 너무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남에게 정직을 요구하는 정직운동은 정죄하는 분위기가 된다는 점에서 예각을 이루는 운동이지만 신뢰는 정직과 연결되는 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있기 때문에 완만한 둔각을 이룹니다.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날카롭게 부딪치면서 주변으로부터 독선자요 외식자들이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계속 이 방향으로 외쳐왔다면 결국은 정직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감수성은 다소나마 더 성장하고 나아졌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기윤실이 좀 더 단순하고,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끝까지 할만한 영역에 힘을 집중함으로써 운동성을 더 회복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