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많은 전쟁이 있어왔다. 전쟁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한 시대의 틀을 결정하기도 한다. 카르타고와의 포에니전쟁 이후의 로마의 지중해 제해권 확보, 악티움해전 이후의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제정, 1차 대전 후의 국제연맹(LN: League

of Nations)과 2차대전 후의 국제연합(UN) 체제 등 인류는 전쟁을 통해 역사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왔다. 물론 전쟁이 아닌 외교와 협상에 의해 역사의 국면을 바꾼 적도 많다. 고려시대의 서희의 외교는 전쟁보다 큰 성과를 가져왔고, 소진과 장의 변증은 춘추 전국시대를 주름잡기도 했다.

일본의 근대사를 결정짓는 명치유신(明治維新)의 한 가운데 우리는 한 상인이자 시대의 선각자였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3~1867.12.10)를 생각하게 된다. 근래에 그는 탁월한 역사소설가에 의해 재생되어 일본의 가장 존경받는 사람의 자리에 오래 머물고 있다. 일본의 많은 무사와 막부 시대의 영웅들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을 제치고 그는 최고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아사히 신문이 조사한 지난 천년동안의 일본 정치지도자중 가장 좋아하는 인물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인물이며, 재일동포 후예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언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오늘의 그는 ‘료마(龍馬)가 간다’란 탁월한 소설을 쓴 시바 료타로의 공을 입은 바 크나, 명치유신을 ‘무혈(無血)혁명’으로 이끌며, 일본 정신의 원형이라는 ‘덴노(天皇)’의 복권(復權)을 성취시킨 그의 비전과 전략에 있기도 할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의 18세기 말엽 명치유신 직전에 일왕을 정치개혁의 실질적인 중심으로 삼고 개화를 추진하다가 33세의 나이에 암살된 인물이다.

당시 무력(武力)이 가장 강했던 사쓰마(薩摩)와 죠슈(長州) 두 지역이 동맹을 맺고, 막부가 권력을 왕실에 넘기도록 쌍방을 조정하고 서로의 목적을 이루게 한 정치적 상행위(政商)로 평가되는 그의 역사적 공은 측량하기 어렵다. 료마의 업적은 바로 사쓰마와 죠슈의 ‘삿죠(薩長)동맹’과 권력이 왕실로 넘어간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중개한 것이었다. 양대세력의 불가피한 전쟁을 협상과 거래 그리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설득으로 전쟁을 막은 것이다. 그는 ‘전쟁 영웅’이 아니라 ‘거간(居間)’이었다. 그리고 료마가 흥정하고 거래한 것은 역사와 정신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해가 충돌한 당시 사쓰마와 죠슈는 만나면 칼로 베어버리는 원수였다. 피로 얼룩진 이들에게 료마는 “천황의 강성 국가를 만드는 것이 공통의 꿈이 아니었냐”고 꿈에 대하여 말했다. 막부를 향해선“지금 체제로 당신들이 꿈꾸는 부국강병이 실현될 수 있겠냐”고 말했다. 그의 조정과 설득으로 쌍방은 이해를 넓혀갔다. 명치유신의 중심 세력이 주창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에서 ‘양이’를 빼고, 그 자리에 막부가 남긴 ‘근대화’를 집어넣은 ‘황금 결합’이 바로 료마가 일본에 남긴 최대 업적이었다.

료마는 일본역사에서 ‘무혈 혁명’을 상징하지만 본인은 자객들의 칼에 의해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역사와 정신을 흥정하는 거간은 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 영웅보다 더 많은 적을 만들고 더 많은 위험 속에 노출되는지도 모른다. 그의 생은 33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유연한 사고, 실천적 행동력, 리더십으로 100년 후를 계획했으며, 그에게서 변혁의 시대를 살아나가는 리더십과 처세술을 후대사람들은 배우고 있다.

료마는 1863년 가쓰를 도와 고베 해군훈련소 설립에 힘쓰고, 이후 가쓰가 물러나고 훈련소가 문을 닫자, 무역회사인 가이엔타이(海援隊)를 세운다. 가이엔타이는 이후 군수 보급을 하기도 한다.

죽기 전에 그는 "세계의 가이엔타이를 만들고 싶소." 라고 말했으며,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이 후에 전하기로는 이 때의 료마야말로 명치유신의 핵심추진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보다 두 배나 세 배는 더 큰 인물로 보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료마가 어렸을 때 오야베 유모가 말해주었다. "풀종다리는 몸이 작지만 새벽을 알려주는 거야." 료마는 역시 풀종다리였던 것이다. 작은 새이지만 새벽을 알리는 지성이었던 것이다. 한 상인이자 선각자였던 료마의 생각과 행동으로 일본역사는 새로운 계기로 근대화와 세계 경제대국의 길을 미리 열어 나간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의 역사에 비추어 재해석하고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어 가는 시바 료타로의 펜(Pen)도 대단하다.

우리는 미,중,러,일의 4대 강국을 곁에 두고 남북이 분단되어 대립된지 60년이 넘었다. 지금도 핵과 남북경협과 교류를 두고 남한 내에서 여론이 다르고, 6자회담 당사국의 이해도 같지만은 않다. 이념과 빈부차로 나뉘어지고, 지역으로 종파로

나뉘어진 우리사회를 통합하고 조정, 중재하여 서로에 유익한, 적어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조화의 리더는 없는가?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에 타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동시에 쌍방을 정확하게 알고 서로의 관점을 조율하는 료마와 같은 리더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시대의 선각자, 새로운 협상가로 몸 바쳐 국운을 개척해 나갈 리더는 누구이며, 그를 다시 우리시대에 영웅으로 부각시킬 펜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