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고위 공직자를 뽑는 국회 청문회를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청백리의 표상이 될 만한 사람을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분들이 한결같이 법을 어긴 범법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위장전입은 징역 3년이나 되는 엄한 범죄입니다. 그런데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대법관 후보자 그리고 특임 장관 후보자들이 한결같이 이러한 범죄의 우물 안에 있었습니다. 이들이 하는 한결 같은 변명은 자녀를 위함이었고 당시의 국가가 원했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를 위하는 마음이야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사자들이 법이 정한 범죄의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직 자신의 사욕을 위하여 위장 전입을 한 것입니다. 법을 몰라서 그렇다면 동정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투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환경적 상황이라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를 무엇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장 전입이 불법임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도 법을 집행하는 분들이 그랬다면 옹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참으로 심각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렇게 장관들의 청문회가 너무나 허탈하였기에 마지막 날 국무총리의 청문회를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그 동안 보여 주었던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장관들과는 다르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국무총리를 정치적 야욕이 아니라 마지막 자신의 생애에 국가를 위한 헌신을 소명으로 여기고 나왔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청문회를 멋지게 통과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였습니다. 국무총리 지명자 역시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이 더욱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청문회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 아픈 모습들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 완벽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멋진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 대통령을 비롯하여 모든 국무위원들이 위장전입을 비롯한 다양한 부정에 참여한 공범이 되었습니다. 이러니 누가 정직하게 살려고 하겠습니까? 얼마 전 나온 보고서와 같이 10억만 준다면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겠다는 청소년이 20%에 육박하고 있는 것은 기성세대의 충실한 가르침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슬펐습니다. 더구나 공직자를 세우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처리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냉철하게 판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임명권을 가지고 있는 청와대는 부정의 사실을 미리 알았지만 나라 일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습니다. 한 술 더 떠서 대변인은 이러한 문제로 시간을 끄는 것은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라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입에 재갈을 물고 슬퍼하여야 할 이들이 오히려 별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부가 앞장서서 국민에게 부정을 해도 일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독려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부와 권력을 만들면 문제없다는 이러한 망국의 정신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실용주의라면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오늘의 모습은 마치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모습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을까요?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한 통속이 되었습니다. 거짓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얼마든지 거짓을 행해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사회적 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분들의 머릿속에는 관습이라는 망령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 뿌리박혀 있는 암 덩어리입니다. 우리나라는 언제쯤 정직한 사람이 성공하고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까요?

우리 나라의 부패지수가 아직도 후진국에 속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지도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신이 하면 로멘스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나라는 여전히 후진국입니다. 정말로 주머니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겠지만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꿈꾸어 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갖는 것이 헛된 망상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완전한 소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소망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더욱 불행합니다. 소망은 한 걸음씩 나아지는 것입니다. 한 번의 모든 변화가 아니라 한 번의 작은 발걸음이 필요합니다.

정말로 정직이 사회 구성원의 참된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정직하면 따분한 것이 아니라 정직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날을 기다려 봅니다. 사실 정직은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다 부담스러운 화두입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나아지지 않습니다. 정직하기 때문에 정직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기에 정직한 사회를 위하여 함께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직의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정직과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복음에 합당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존재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코람데오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의 부담이 영원한 영광이 됨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서 부단한 영적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코람데오가 없는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코람데오가 있는 세상은 희망이 보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은 바로 코람데오입니다. 모두가 세상의 손을 의지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는가? 이제는 우리는 답을 해야 합니다. 코람데오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코람데오가 이 땅에 필요합니다. 다시금 우리의 자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거짓된 가치들이 활개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산다면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자신들의 부를 위하여 법을 어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으로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질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그 날을 생각한다면 이제 청산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