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학교에 다니던 때,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급우 級友들과 어울려 미리 도시락을 까먹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았습니다. 배고팠던 시절, 한창 클 나이에 점심때까지 기다리고 앉아있는 것이 꽤나 힘들었던가봅니다. 요즘의 브런치brunch처럼 늦은 조반 朝飯 겸 이른 점심으로 도시락을 꺼내먹을 때면 아예 젓가락을 들고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니며

급우들의 도시락 반찬을 축내는 짓궂은 친구도 더러 있었는데, 그것이 못마땅한 아이들은 제 도시락 반찬에 미리 침을 뱉어 남이 먹지 못하도록 든든한 방어벽(?)을 쳐놓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구미 口味가 당겨도 남의 침이 묻은 반찬을 집어먹을 만큼 비위 脾胃가 좋은 아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침은 더럽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침을 뱉는 것은 커다란 모욕행위가 됩니다. 대제사장이 피고인 예수를 직접 신문 訊問하는 종교법정 宗敎法廷에서 방청석의 유태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마가복음 14:65). 신성모독 神聖冒瀆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침 뱉기의 모욕으로 되갚음을 한 셈입니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누워서 침을 뱉는 것은 하늘에다 침을 뱉는 것과 같아서 그 업보 業報가 부메랑 boomerang처럼 고스란히 자기한테로 돌아온다는 무서운 뜻입니다. 침이 더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생긴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침이 마르면 건강도 마른다'고 할 만큼 침은 우리 몸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침에는 수십 가지의 효소와 무기원소, 비타민 등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동의보감 東醫寶鑑에는‘침이 인삼 녹용보다 더 좋은 보약 補藥'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침에 상당한 치료효능이 있다는 것은 동물들도 잘 알고 있는 생태계 生態界의 상식입니다. 그래서 어미 짐승은 귀여운 새끼의 몸을 제 침으로 정성껏 핥아줍니다. 그런데 침의 성분과 효능은 사람의 체질과 건강상태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고 합니다. 특히 음식이나 영양상태가 나쁘면 침의 성분도 나빠지고 분비량도 적어집니다. 남을 칭찬하는 좋은 말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지나치게 하면 곤란합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침이 자주 마르게 되면 구강건조증 口腔乾燥症이 생겨 충치나 치주 齒周 질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침과 건강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 경제성장의 기틀을 다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30주기周忌를 지나면서 고인의 공과 功過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습니다. 박정희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 警氣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지난 시대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피땀을 흘렸던 근로자들에게 경제성장의 공 功을 돌리면서 고인의 업적을 깎아내립니다. 그러나 근로자들의 노고 勞苦가 고인의 역할을 부정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이 오직 박정희 혼자만의 공이라고 우기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지만, 그의 열정과 집념이 이끌어낸 지속적 성장기반의 구축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입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골방에서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집현전 集賢殿, 언문청 諺文廳, 정음청 正音廳의 여러 학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이룩해낸 결실이지만,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역사적 인식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충무공의 빛나는 대첩 大捷이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으로 성취되었다고 해서 공의 업적이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병사와 지휘관은

각자의 몫이 따로 있습니다. 근로자에게는 근로자의 몫이, 기업가에게는 기업가의 몫이 있듯이 나라의 지도자에게도 그 나름의 몫이 있는 법입니다.

헌정사 憲政史의 굴절 屈折을 초래한 군사쿠데타와 10월 유신, 자연생태계와 사회통합에 적잖은 희생을 떠안겼던 개발독재 開發獨裁로 인해 수많은 학생, 노동자, 민주인사들이 큰 고초 苦楚를 겪었습니다. 경제성장의 수치 數値만 기억하고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천민자본주의의 물신숭배자 物神崇拜者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신독재의 과오에는 정당한 비판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판과 함께‘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며 이를 악물고 몸부림쳤던 박정희의 리더십에도 그에 합당한 역사의 빛을 비추는 것이 옳겠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북한의 1/4 수준인 90달러에 불과했던 시절, 고인의 주도로 산업화에 매진한 한국인들은 비로소 수천 년 찌든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박정희의 각오에서‘나 죽은 뒤에는 몰라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는 독선 獨善을 읽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독설 毒舌이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 침을 뱉고 말고야 각자의 자유이지만, 뜬금없는‘침 논쟁'을 보면서 엉뚱한 의문 하나가 내 머리를 스칩니다. 한국인들의 입에 고이는 침의 성분이 박정희시대를 전후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국민소득이 90달러일 때와 20,000달러에 가까울 때는 음식과 영양상태가 다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침의 성분도 많이 향상 向上되었음직 합니다. 197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력이 앞섰던 북한의 국민건강이 지금은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어려운 형편이라고 합니다.

북녘 어린이들의 영양상태는 측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저들이 외친 주체 主體와 자력갱생 自力更生의 구호는 한국 등 여러 나라의 식량원조에 비주체적 非主體的으로‘의존'하는 허구 虛構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박정희의 산업화는 중국의‘사회주의 개발독재'와 다를 것 없어 찬양할만한 일이 못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주장이 성립되려면 지난 시대의 한국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시 달성'이 가능했고 오늘의 중국도 그렇다는 역사적 가정 假定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과연 그럴까? 냉철한 현실관 現實觀이 아쉬운 대목입니다.

부 富와 문명에 연연하지 않고 소박한 삶, 가난한 살림에 자족 自足하는 것은 매우 차원 높은 인문적 가치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한 나라의 가치관으로, 전 국민의 신념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국민에게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구도자 求道者이기를' 강요하는 또 다른 독선이요, 인문의 향기를 풍긴다는 교양인들의 도덕적 오만 傲慢 혹은 위선 僞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경제성장을 위해 개발독재를 무작정 칭송하는 비인간화 非人間化의 길을 걸을 수도 없습니다. 바람직하기로는, 국가발전을 위해 개인의 권익 權益을 일정 부분 유보 留保할 수 있는 ‘불가피한 성장통 成長痛'의 범위 내에서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추진하는 산업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결국 산업화와 민주화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추구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일 텐데, 안타까운 것은 한국이 ‘산업화→ 민주화'의 순서를 선택하여 오늘에 이른 반면 북한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독재와 빈곤'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점입니다. 경제개발 대신 핵개발을, 민주화 대신 군사화 軍事化를 추구해왔을 뿐입니다.

▲ 절대왕정과 다름없는 세습독재의 북한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수준이라는데,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는 실질소득(GNI)은 400달러가 채 안된다고 합니다. 그 처절한 독재와 빈곤의 이중지옥 二重地獄 속에서도 북한인민들은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위대한 장군님 덕분에 너무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면서 눈물을 글썽이곤 하지만, 웬일인지 리히텐슈타인 R. Lichtenstein의 저 유명한 그림‘행복한 눈물 Happy Tears' 같은 감동은 다가오지 않습니다.

‘산업화에 성공한 독재자' 박정희의 무덤에 침을 뱉겠노라고 팔을 걷어붙이면서 개발의 업적보다는 독재의 흠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에 실패한 세습독재자'에게는 여간 관대하지 않습니다. 외신과 국제인권단체 그리고 탈북자들이 생생하게 전해주는 집단공개처형이나 정치범수용소의 참상 慘狀 등 끔찍한 인권탄압의 현실에도 그저 눈과 귀를 꼭꼭 틀어막고 있을 뿐입니다. 친일인명사전 親日人名事典에 이름을 올리고 젊었던 한때의 부끄러운 행적을 기록한다 해도, 국가발전에 기여한 박정희의 발자취는 그보다 더 선명한 모습으로 조국의 역사에 길이 새겨질 것입니다. 그 발자취에 남아있는 흠과 티와 허물도 함께. 예나 지금이나 애정표현의 몸짓으로는 키스가 단연 으뜸입니다. 그런데 연인 戀人끼리의 짙은 키스에는 서로의 침이 섞이게 마련입니다.

연인의 침이 더럽게 느껴진다면 키스는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연인의 침을 꿀처럼 달콤하게 만들어 줍니다. 내 어렸을 적, 몸에 가벼운 생채기가 나면 어머니가 침을 발라주시곤 했습니다. 더럽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침을 발라 불치병을 낫게 해 준 일이 있습니다(마가복음 7:33~, 8:23~, 요한복음 9:7~).

연인의 침, 어머니의 침, 예수님의 침이 지닌 신비한 효능은 무슨 약리적 藥理的 작용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랑의 힘 때문이 아닐까? 박정희의 무덤에 정녕 침을 뱉고야 말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굳이 침을 뱉으려면, 모욕의 침보다는 치유 治癒의 침을 뱉으라고... 개발독재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의 침을... 그리고 침을 뱉기 전에, 그 침의 성분과 효능이 고인의 과오 탓에(혹은 덕에?) 얼마나 크게 향상되었을지도 한번쯤 헤아려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