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to know’과‘사는 것to live

(마 16:13-20) (눅 10: 25-37)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알고 있느냐? (호 6:3) (마 16:13-20)
 3년 동안 모든 것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12명의 제자들은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세상 사람들이 풍문으로 떠들어 대던 예수님을 그들도 똑같이 알고 믿으며 따라 다닌 것인가? 엘리야나,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중의 한사람,  아니면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해방시킬 영웅적인 대왕의 하나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는 영적 구원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알고 믿었는가? 그런 확고한 신앙이 있었다면 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모두 도망쳐 버렸는가? 우리는 의문이 간다.  히브리어에 안다’는 말은 상대방에 대한 단순한 정보수집information 단계를 뛰어넘어, 수십 년을 결혼해서 살면서 자식 낳고,  한 이불 덮고 살을 섞으며 미운 정, 고운 정에 하나가 된, 부부간에 만 쓰는 말이다.  장점,  단점,  알 것 다 안다는 말이다.

  2, 「진리를 아는 것」과 「진실을 사는 것」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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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00 여 년 전의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독배 사건”은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충성했던 국가 권력과 당시의 궤변주의자, 소피스트들 사이비 철학자들이 조작한 비극이었다. 인간의 무지와 모순을 보면서 ‘네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고 외쳤던 소크라테스의 행동이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타락시킨다는 죄목이었다.
  철학은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절대가치, 진선미중 최고의 가치이지만 철학을 하는 철학가들이 진리나 진실,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처럼 아는 것, 지식과 아는 그대로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진리를 아는 데로 살려고 하는 사람을 의인이라 부른다.

 4,000년 전 고대 도시국가 소돔 고모라는 인구 10여만의 나라였다고 한다. 이런 대 도성이 하루아침에 멸망한 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짐승처럼 타락해버린 그 성을 기둥처럼 지키고 깨우며 살려낼 만 한, 빛과 소금노릇을 할 의인 10명이 없었다. 10만 명중에 10명이면 만분의 일이다. 만 명 중에 단 한명의 의인이 없어 그 성은 지진 화산폭발로 불타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저 넓은 바다가 수십 억 년이 흘러도 썩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3%의 소금 때문이다. 97%의 맹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은 3%의 소금이 많은 97%의 맹물을 지키고 살려낸다는 말이다.

  3, 너도 「가서」 그렇게 「살라」「go and do, like wise」(눅 10: 25-37)

예수를 따라가는 길은 -예수의 삶을 닮아가는 길이다. 예수처럼 사는 길- 하나님처럼 사는 길이다. 나를 따르라! follow me!는 나를 닮아라! imitate me! 는 의미다. 배운다는 것, 안다는 것-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참 지식은 가르치는 스승의 머릿속 지식을 배우는 것 뿐 아니라 스승을 닮아가는 것 스승처럼 사는 것이다.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을 묻는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이냐?’ ‘go and do, likewise' 너도 가서 그와 같이 살라’ 신앙은 ‘아는 데로 살기’다. 사랑은 머리로 암기하는 지식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이다. 강도나, 제사장, 레위인과 달리 사마리아사람은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만나, 모든 것 빼앗기고 죽도록 얻어맞고, 피투성이 가되어 길가에 버려진 상태, 그대로 놓아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보고, 신음소리를 듣고, 강도만나 쓰러진 것을 알고, 말에서 내려와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고 그를 일으켜 자기 말에 태우고 자기는 말고삐를 잡고 마부가되어 함께 동행 한
‘거룩한 동행자, 거룩한 알리바이’ 가 되어준 것이다.  이 비유에서도 보고, 듣고, 안다,  그리고 내려와서 함께 걸어가는 이야기다. 안다’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는, 말에서 내려, 낮은 자리에 서는 understand 뜻을 내포하고 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함께하시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루하루 우리와 함께 숨쉬고,  함께 걸어가시는 동행자로 사시려고,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은 땅에 내려오셨다.  보고, 듣고, 알고 understand, 살아서 그래야 속속들이 사랑하실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죽을 자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실 수 있으니까.  이것이 믿어져야 우리의 신앙이 올바로 선다.  아름다움이란 ‘앎 다움’ 이다.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바로 그러한 삶이다.

   하나님 사랑의
육화肉化formation가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成肉身의 예수님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만남의 체험 없이는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이나, 언어의 논리로 해석interpretation되고, 규정되고 정의definition되는 하나님이 아니다. 이런 사고는 어불성설語不成說, 불립문자不立文字나 마찬가지다. 욥기는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의 이치를 어지럽게 말라고 말씀하신다.

 동의보감을 쓴 허 준의 일대기를 보면 감명 스럽다. 천하고 낮은 상놈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어의까지 된 허 준은 젊어서 “명의 유의태” 밑에서 약초 캐는 일꾼으로 자란다.  나중에 어깨 너머로 배운 의술과 처방이 뛰어나 명의수준에 이르지만 그의 눈에 비친 건 아무리 실력이 있고 의술이 높아도 양반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때 당시 의술과거 시험이 있어 유의태 아들과 같은 해에 과거시험을 보러 서울로 올라간다.
 
 유의태 아들은 말을 타고 며칠 만에 상경하는데 허 준은 걸어서 몇날 며칠을 주막집에 자면서 올라간다.  그때마다 주위의 아픈 사람을 만나고 돈이 없어 치료도 못 받고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그들을 치료한다.  갈 길이 바쁜 사람이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환자들에게 발목이 잡혀 올라가지를 못하고 끝내 과거 날짜에 늦어 버리고 만다. 

  유의태 아들은 합격해서 금의환향을 하는데 허 준은 길 도중에 붙들려 소식이 감감하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생각게 하는가.  "의원의 본분과 자기 영달"의 문제다.  성공 출세를 위해서는 죽어가는 환자를 못 본채 버려두고 유의태 아들처럼 쏜살같이 과거장으로 달려 가야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본분인 의원의 철학이 있다면 자기 영달의 문제보다 눈앞의 생명 살리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
무엇이 되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 가 더 중요하고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지식이나 기술, 돈, 명예보다 본분을 아는 철학이 없으면 빈 껍질이고, 사기, 거짓신기루,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한국교회의 위기는 무엇인가? 믿음’‘사랑’은 ‘명사적인 개념’이 아닌‘동사적 개념’이다. 인격적 결단과 삶이어야한다.

 

박 영남 목사
세계선교사 협회 G,M,C 총재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원 교수(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