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세 일기로... 발인예배 27일 오전 삼성서울병원

 1907년 최초로 제주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이듬해 성내교회를 개척한 이기풍 목사의 막내 딸 이사례 권사가 숙환으로 소천했다. 향년 86세. 고인의 장례식장은 삼성서울병원이며 발인식은 27일 오전에 열린다.(02-3410-6093)

고인은 국내외를 다니면서 이기풍 목사의 순교 신앙을 소개하는 일에 힘써왔다. 2007년 6월 8일 강변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월례회에서 고인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직접 참석,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 이기풍 목사가 가르쳐 줬다는 가훈, 관용과 백인(백번이라도 견디는 것, 인내), 겸손을 소개하며 “아버지 스스로가 그런 삶을 몸소 보여주셨다”고 소개했었다.

 
▲ 이기풍 목사의 딸 고 이사례 권사가 2007년 6월 한복협 월례회에서 아버지 이기풍 목사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뉴스 파워

이기풍 목사는 1907년 일곱 명의 평양신학교 제 1기 졸업생 중의 한 명이다. 이 목사는 이듬해 2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받게 된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기다린 건 환대가 아닌 ‘야소교 목사’라며 손가락질과 온갖 냉대였다. 이유는 제주도의 풍속이 워낙 다른 탓도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학살의 파장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건 곧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사람들로부터 처음 인정받게 된 계기는 홍수 때문이었다. 40대의 여성이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지만 다들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이 목사가 직접 물에 뛰어들어 그 여인을 구했던 것. 이때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이 목사에 대해 “과히 나쁜 사람은 아니군” 하며 인정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 목사는 제주도 전도 계획을 세우고, 조랑말 한 필로 제주도를 돌았다. 제주도 한 바퀴를 도는 데 한 달이 걸릴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로 할 수 없는 천대를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했고, 제주도에서의 13년 사역할 동안 이 목사는 성내교회를 비롯해 15개의 크고 작은 교회를 개척했던 것이다.

이후 이 목사는 전남 순천의 벌교에서 8년간 사역하며 다섯 개의 예배처소를 개척했다. 70세가 되었을 때는 여수 우학리교회로 부임했다. 그의 목사관 뒷산엔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 국경일 참배가 끝나면 이 목사는 의례히 고등계 형사에 의해 연행되어 갔다. 이유는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한다며 스파이로 의심했고, 묵시록을 강해했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늘 설교 때마다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우상을 섬기는 일본은 망한다”고 외쳤다.

이기풍 목사는 취조를 받을 때마다 누가 취조인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신사에는 절할 수 없다”며 고함을 칠 정도였다. 2년간 여수경찰서에서 시달리다가 결국 교회로 돌아와 1942년 6월 20일에 순교했다.

 
 ▲ 이기풍 선교사가 동네주민들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했고, 딸 이사례 권사가 전도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놀았다는 성내교회 마당에 있는 팽나무. 이 교회 출신 이동준 담임목사와 강수일 장로 ?뉴스 파워 소병기

고인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외유내강, 겸손한 분이었다”고 소개하고 “어머니는 애양원의 환우들을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고, 아버지가 경찰서에 가 있는 동안엔 대신 교회를 지키며 설교를 하셨다”고 말했다. 이 권사는 “어머니는 목회자의 아내, 총회장의 아내로 누릴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고 몰지각한 사람들을 관용하고, 환우들의 섬김이가 되어 주셨다”며 “이것이 오늘도 내게 큰 교훈이 되고 있다"고 소개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