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이끌리는 설교를 하라
                       동서울/서울 노회 수도권 신학포럼, 성황리에 마쳐 

422() 고려신학대학원이 주최하는 동서울/서울 노회 수도권지역 신학포럼이 서울시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수도권지역 신학포럼은 422() 동서울/서울 노회, 423() 수도/수도남 노회(군포성안교회), 52() 경인/서경 노회(부천참빛교회)에서 각각 진행된다.

올해 신학포럼은 수도권지역 노회를 나누어서 시행되었음에도 동서울/서울 노회 지역 목회자들이 70여명 정도 참석하여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신학포럼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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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포럼이 성황리에 진헹되고 잇다.


 발표에 앞서 포럼 기획실장인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회사)는 인사를 통해 신학포럼은 신대원과 교회와의 관계 증진이 목적이라며, “말씀의 교제가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아울러 신대원의 두 가지 중요한 임무가 신대원이 목회자를 찾아가는 신학포럼과 목회자가 신대원을 찾아가는 목회대학원인데 상호 유기적으로 진행되길 바란다고도 전했다.

오전 시간은 최봉환 목사(준비위원장, 동서울노회장)의 사회로 권중신 목사(동서울노회 부노회장)가 기도한 후에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성령에 이끌리는 설교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박 교수의 발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 / 박영돈 교수

 설교 박영돈 교수.jpg(사진)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에 대해 발표하는 박영돈 교수 
 한국교회에 강해설교의 붐이 일어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강해설교에 대한 관심만큼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에 대한 관심은 아직 미흡하다. 이 둘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를 하기 위해 설교자는 성령을 도구화하려 해선 안 되고 오히려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강단은 신앙의 선진들이 가졌던 깊은 영성도, 신학적 혜택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자질도 부족하다. 강단에서 전파되는 메시지에 복음의 골자는 빠지고 신자의 헌신과 열심을 고취시키는 윤리적 지침과 권면으로 가득하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마음에 비추는 성령의 조명과, 그 빛 가운데서 성경 속에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현실을 총괄적으로 파악하는 신학적 통찰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된다.

성령 충만이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속에 사는 것을 뜻하며, 설교자는 삶의 모든 정황에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선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체질화되어야 한다. 강단 아래서 성령을 따라 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설교 시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은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큰 긍휼인 동시에 설교자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 성도들은 복음이 설교자의 심령과 인격과 삶에 구체적으로 체화되어 전인격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를 듣기 원한다. 주일설교 준비는 설교를 작성하기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 성령을 온전히 따르는 삶으로 해야 한다. 실제 설교를 준비하는 데 있어 가장 우선되는 일은 자신을 성찰하는 기도와 회개다.

설교자가 성령을 의존한다고 해서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스펄전은 공부에 더 이상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설교자는 우선 본문에 충실해야 한다. 말씀의 저자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행위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성령께 집중하지 못해서도 안 된다.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게으름과 과잉열심 사이에서의 중용의 묘를 터득해가야 한다.

설교는 인간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설교 그 자체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의 행위다. 설교의 능력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라는 비천한 방법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설교의 위기는 인정욕구나 성취지향적 욕망에 사로잡히는 데서 온다. 설교자는 청중의 눈치를 보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한다.

설교자는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 가운데 차분하고 온유하게 설교해야 한다. 전하는 메시지만큼 전하는 자의 자세와 호흡, 인상과 음성이 중요하다. 부드러운 음성에 성령의 은혜와 힘이 실릴 때 듣는 이들을 감화하여 강퍅함을 꺾는 역사가 일어난다. 설교는 이렇게 전인격적으로 나타난다.

아무리 좋은 원고를 작성해도 원고 자체에 사로잡혀서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선 곤란하다. 설교의 막중한 사명 앞에 자신의 무능을 절감한 사람만이 성령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설교자는 기도로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기도가 성령으로 충만하는 방편인 동시에 성령 충만의 증거이기도 하다.

능력 있는 말씀의 선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설교자 자신뿐 아니라 모든 교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목사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동참해야 할 사역이다. 목사의 은사와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교인의 기도의 지원 없이 설교에 큰 권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마지막으로, 설교사역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다. 복음사역자들은 비록 복음의 열매가 빨리 나타나지 않고 교인들의 변화와 교회 성장이 지체될지라도 말씀과 성령의 원칙을 따라 주의 일을 해야 한다. 은혜를 한없이 탕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탕자들을 설복하듯이, 자신의 청춘을 낭비하는 것 같은 설교자의 사역이 마침내 죄인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이키게 할 것이다.

논찬 및 질의응답

논찬하는 최한주 목사.jpg  (사진) 논찬하는 최한주 목사 
 논찬을 맡은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설교자를 읽었을 때의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내용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분은 없을 것이고, 이 내용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반성해야 한다고 논찬하였다. 청중에서는 1) 성령 충만, 2) 과거와 오늘날의 설교의 차이, 3) 예화의 사용, 4) 신대원 차원에서의 목회자를 향한 실천신학적 도움 등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1) “이차적 세례에 대해서는 반대하나, 중생자의 마음에도 계속해서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죽여 나간다는 의미에서의 성령 충만이 필요하다”, 2) “과거 설교는 실은 신학적으로 탁월한 강해 설교가 아니었으나 설교자의 탁월한 경건을 하나님께서 들어 쓰셨다. 오늘날은 신학적으로 활용할 도구가 많아서 낮은 수준의 설교에 대해 변명하기 어렵다”,

3) “적절한 예화는 설교의 맛을 돋운다는 것을 인정하나, 그런 예화를 구하기 매우 어렵다. 그리고 예화를 찾기 시작하면 설교작성이 예화에 얽매이기 쉬우므로 개인적으로는 절제하고 가장 기본적으로 본문 분석에 천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4) “각 분과 영역을 아우르는 통합적 작업이 필요하다. 다만 콘텍스트가 강조되는 다른 교단과 달리 고신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충실해서 이런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고 대답하였다.

오후 시간은 이장우 목사(서울노회장)의 인도로 안경환 목사(서울노회 부노회장)가 기도한 후 한진환 목사(서문교회)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한 목사의 발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 / 한진환 목사

 예배 한진환 목사.jpg(사진)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에 대해 발표하는 한진환 목사 
 예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배의 목적과 방법을 계시해 주셨고 예배하는 자리에 임재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렇게 우리를 섬겨 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복된 교통이 예배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예배는 이러한 양 방향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다분히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오려 드리는 상향적 행위에 치중되어 있다. 예배는 신인 사이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상호적인 행위이지만 그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향적인 행위들에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예배로서의 입례의식, 설교, 성례, 축도의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입례의식: 입례의식은 입당송, 예배부름, 축복인사, 기원, 영광송, 참회기도 및 사회의 확신 등으로 구성된다. 입례의식은 개개의 순서가 단편적인 별개의 순서들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가진 연결된 순서다. 즉 이 순서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을 표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예배를 위해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설교: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다. 인간 설교자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그 이면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설교자는 하나님이시다.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신 후에는 인간 설교자를 통해 '지금 여기'에 자리한 회중에게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입으로 세움 받았다고 해서 강단에서 쏟아내는 모든 언사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으로 부름받은 것이지 자신이 왕은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왕의 말씀을 듣는 믿음과 겸비함이다. 설교 중에 복음 자체를 분명하게 증거하지 못하고 복음의 중요성과 유익에 대해서만 늘어놓는 'about' 설교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설교의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된 것은 설교자들의 지적 능력이나 커뮤니케이션 기법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설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확신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례: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다.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구원과 신령한 복과 같은 영적인 실체를 가리킨다. 성례를 통해 하나님은 그런 영적인 실체를 주신다. 성례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세례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 사함과 거듭남에 대해 인 쳐주시는 것이다. 성찬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하나님께서 인 쳐주시는 의식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성례를 인간이 주도적으로 행하는 의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례가 주는 풍성한 은혜를 상당 부분 놓치고 있다.

축도: 하나님께서 족장이나 제사장을 통해 축복하는 것은 언약을 확실히 이루겠다는 약속이요 선언이다. 교회는 언약적 관습을 따라 예배의 마지막을 축도로 장식한다. 축도는 예배자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 편에서 올려 드리는 기도나 기원이 아니라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신적 행위이다. 축도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 또한 축도는 신적 행위이기 때문에 끝말도 '있을지어다'가 되어야 한다. 축도에 수식어를 붙이기보다는 삼위의 이름으로 간결하게 하는 것이 좋다.

한국 교회 예배의 문제의 뿌리는 예배를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상향적인 행위로만 생각하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잘못된 예배 신학에 있다. 예배는 하나님과 회중 간에 상호 교통하는 행위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하향적인 행위들이라는 예배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해야 한다. 예배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지켜보고만 계신 분이 아니다. 예배의 매 순서 가운데 친히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회중이 이같은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거룩하신 임재 앞에 서는 영광을 자각할 때 우리의 예배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논찬 및 토론

  논찬하는 손덕현 목사.jpg논찬을 맡은 (사진) 손덕현 목사(보은교회)하나님이 섬겨주시는 예배의 의미를 회복하게 한 훌륭한 강의라며, “본질이 많이 파괴된 한국 교회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운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1) 예배 순서를 상향, 하향으로 나누었는데, 그럼에도 예배의 매 순서마다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교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2) 설교에서 하향적인 것을 강조하다가 목사가 자신을 교조화하는 경우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3) 대표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없는지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이에 대해 한 목사는, 1) “논지를 강조하기 위해 상/하향을 나누었지만, 매 순서마다 교류가 일어나는 것이 맞다”, 2) “설교자가 스스로 자신은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 설교행위가 타성에 젖어 잘못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선포라는 본질이 퇴색될 수는 없다”, 3) “기도는 말씀 선포자가 하는 것이 맞다고 보지만 모든 목회현장에 막바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바르게 세워진 사람이, 최대한 공적인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고 답변하였다.

 최한주 목사는 1) 하향적 행위를 강조하면 로마 카톨릭의 우를 범하게 되지는 않는지, 2) 입례의식에서 현대적 감각과 트렌드를 가미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상향적 반응을 강조한 것 강닌지, 3) 성찬에서 한 떡과 한 잔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실제 성찬을 시행할 때 원활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해 한 목사는, 1) “인간 편에서의 상향적 반응도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날은 마치 그 반응만이 예배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예배는 하나님의 행위다. 다만,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면서도 개교회의 현장성을 살릴 수 있다고 보는데 이에 대한 목회자의 고민이 필요하다”, 2) “인간은 전인적인 경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일반적인 형식을 사용해도 좋다고 본다고 대답했다. 나머지 질문에 대해 이성호 교수는 루터란처럼 예전이 잘 발달된 곳은 한 떡과 한 잔이라는 의미를 잘 살려 성찬을 수행할 수 있지만, 한국 교회가 바로 이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찬을 잘 수행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