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현교회 원로 김창인 목사 주님 품으로 
              장지는 충현동산이 아닌 왕성교회 부활의 동산

김창인 목사 잠들다.jpg 김창인 목사(충현교회 원로)102일 오전 350분경 향년 96세로 주님 품으로 잠들었다. 빈소는 아산병원 25호실. 장례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장으로 치러지며, 5일간 계속될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박명식 사모, 차남 김성관 목사를 비롯, 장녀 영신, 차녀 혜신, 삼남 성호씨 등이 있다.

1917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김창인 목사는 약관 20세에 전도사로서 목양의 길에 들어섰다. 일제 시대 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일제의 교육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자녀들을 소학교에 보내지 못한 아픔도 있었다.

 1948년 공산정권을 피해 월남한 김 목사는 서울 장충동에 재건교회를 설립했고, 1953년 서울 수복이 되자 현재의 충현교회를 세웠다. 1970년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총회장이 되었고 교계 연합사업에도 힘써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김창인 목사는 탁월한 설교가요 목회자였던 동시에 선교와 교육의 선각자였다. 세계선교는 시기상조라고 여겼던 1968년 첫 번째 해외선교사를 파송했고, 북한선교회를 조직했다. 교단이 엄두를 못 냈던 유초등부 계단공과를 집필했고, 상설 교사 양성부를 개설했으며, 연령과 직업에 따라 주일학교를 나눴다. 국내 최초로 겨울성경학교도 시작했다.

교회 내에 경찰, , 의료선교 등 각종 위원회를 두어 분야별 전문사역이 이뤄지게 조직화한 것도 그였다. 한때 3만여 명이 출석하는 대형교회로 성장시켰으며 수많은 기라성 같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그를 거쳤다. 그러나 은퇴를 앞두고 당회장권 승계 과정에서 이종윤, 신성종 같은 쟁쟁한 목회자들이 불미스럽게 퇴장했고, 차남 김성관 목사(70)에게 1997년 교회를 물려줘 최초의 목회세습을 시행한 것으로 기록됐다.

  김 목사는 최근 이종윤 목사를 찾아가 화해를 했으며, 지난 6월 기자회견을 열어 "아들을 무리하게 담임 목사로 세운 것은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참회하기도 했다. 발인은 6일 오전 9. (02)3010-2265

 한편 아들 김성관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충현교회는 원로 김창인 목사임에도 교회의 공식 홈페이지를 닫고 있어 많은 성도들은 장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또한 장지도 충현교회에서 관리하는 충현동산이 아닌 의정부 동두천 왕성교회 부활의 동산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을 접한 한 교인은 총현동산이 아닌 왕성교회부활의 동산이란 말을 듣고 순시울을 적시며, ‘이게 우리교회가 할 도리는 아니라고 본다라며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