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탈북 女간첩 검거] 신분 감추려 애정 행각… 한국판 ‘마타하리’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소속 간첩 원정화(34·여)는 군 간부를 상대로 각종 군사기밀을 빼내 북한에 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군 간부의 부적절한 처신이 드러난 것은 물론 국가정보원도 제 역할을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판 '마타하리'인가=탈북 위장 간첩으로 낙인찍힌 원정화의 인생은 15세 때인 1989년부터 시작됐다. 특수부대에서 남파공작원 훈련을 받던 원씨는 부상으로 3년 뒤인 92년 의병제대를 하게 됐다. 이후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치다 적발됐고 교화소에서 풀려난 뒤에도 아연 5t을 훔쳐 문제가 됐다. 친척의 도움으로 사건을 무마하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보위부에 공작원으로 포섭돼 남파 간첩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2001년 10월 보위부로부터 남한 침투 명령을 받은 원정화는 조선족 김혜영이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세탁한 뒤 중국 선양 일대 한국인 민박촌을 돌아다니며 위장 결혼 대상자를 물색했다. 한국인 근로자 최모씨와 맞선 하루 만에 결혼한 원정화는 한국 잠입에 성공했고 국내에 잠입하자마자 서울과 양주 등지의 미군기지 6곳을 돌아다니며 촬영하기도 했다.

  입국 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그는 자신의 신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2001년 11월 국가정보원에 탈북자라고 허위 자수를 했다. 수월했던 한국 입국과 달리 원정화의 간첩 활동은 무난하지 못했다. 주요 지령 완수에 실패해 질책을 받자 자신이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살고 있던 집에 자물쇠를 4개나 설치하기도 했으며 3년 전부터는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왔다고 합동수사본부는 덧붙였다.

  ◇한국인 포함 100여명 납치 북송=원정화는 중국 옌지에서 한국인 윤모씨 등 7명을 포함해 모두 100여명의 탈북자를 북송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윤씨는 99년 중국으로 출국한 뒤 실종 처리된 것으로 밝혀졌다.

  2002년 10월∼2006년 12월까지 모두 14차례 중국을 방문한 원정화는 국정원과 하나원, 대성공사의 위치를 파악하고 군장교 포섭 뒤 군사기밀 탐지 및 중국 유인이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특히 대북 정보 요원이던 이모·김모씨를 살해하기 위해 독약과 독침도 받았다고 진술했다. 2006년에는 황장엽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면담했던 탈북자 김한미씨의 위치도 파악하라는 지령도 받았다.

  군을 향한 원정화의 접근은 더 집요했다.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소개받은 김모 소령과 교제하면서 군 관련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정훈장교 출신의 황모 대위와는 아예 관사에서 동거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황 대위는 2007년 10월 원정화가 자신이 북한 보위부 소속 공작원이라는 신분까지 밝혔지만 이를 관계기관에 신고하지도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구멍 뚫린 대북 안보 라인=원정화는 2006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6개월간이나 전방 사단의 대대나 중대 등을 돌며 52차례 안보 강연을 했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파 공작원에게 우리 장병들의 정신교육을 책임지게 한 셈이다. 안보 강사를 선정하는 과정조차도 허술하기 그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기무사령부는 군의 특성에 알맞은 탈북 인사를 골라 강사로 발탁하게 된다. 우선 기무사가 보유 중인 기존 인재 풀을 점검하고 마땅한 인물이 없을 경우 경찰이나 국정원에 협조를 요청한다. 원정화의 경우 경찰이 관리 중인 자원에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결과적으로는 대공수사를 맡고 있는 3개 기관은 여간첩이 군 안보 강사로 선발되는 과정에서 이를 방지하기 위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원정화는 안보 강사에서 해촉된 뒤에도 주요 정보를 갖고 일본으로 간 탈북자 김 모씨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3차례나 일본으로 출국하는 등 간첩행위를 계속했다. 하지만 대공 수사 당국은 1년2개월여나 지난 지난 7월에야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이번 사건 수사는 아직 진행형이다. 수사 당국은 원정화가 그동안 군 부대를 누비며 얼마나 많은 현장 정보를 빼냈는지, 현역 장교들과의 친분을 미끼로 고급 군사기밀을 획득했는지 등에 대해 명확히 밝혀 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탈북자 위장 간첩 첫 적발,의문점도 있어=북한이 직접 간첩을 파견했다가 적발된 사례는 지난 10년간 제3국 국적으로 침투하려다 검거된 정경학 사건이 유일한 상황이다. 특히 10년간 수많은 탈북자가 국내에 입국한 상황에서 간첩 사건이 발생한 것도 이례적이다.

  당국은 원정화의 행보가 수상해 2005년부터 내사에 착수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다. 원정화가 소속된 보위부의 기본 임무는 대남업무가 아닌 방첩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간첩 사건의 대부분은 통일전선부 소속이 많았다. 다만 원정화가 자신의 임무가 탈북자를 잡아들이는 일이었다고 밝히고 있어 이와 관련된 일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원정화가 북한에 보고할 때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태연하게 사용한 점 등은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고 있다. 또 원정화가 수집해 북한에 보낸 것이 부대 위치와 내부 구조, 각 부대 정훈장교의 연락처와 이메일 주소 등에 불과해 이 부분도 추가로 더 밝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