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도(祝禱)』와『복의 선언(宣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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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목회자 대부분이“복의 선언”을“축도(祝禱)”라는 말로 대체하여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복의 선언은 안수 받은 목회자가 성자 예수님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의 복을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선언하는 목회행위인 것이다. 이러한“복의 선언”은 구약에는 대제사장(민 6:24~26)과, 신약에는 사도(고후 13:13)등의 기름부음 받아 특별히 임직된 주님의 사람에 의해 시행하게 되었고, 그것은 곧 안수 받은 목사 많이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이러한“복의 선언”이“축도”라는 말로 변형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교회의 초기에는 안수 받은 목회자가 적어, 목사가 아닌 비 안수(按手) 목회자는“복의 선언”직무(권한)가 없으므로“복을 기원하는 기도”를“축도(祝禱)”라는 이름으로 변형하여 성도들에게“복을 빌고 원한다”는 기원(祈願)적인 뜻을 담은 표현상태로 사용한 것이“축도(祝禱)”라는 관용어가 되어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복의 선언”이라는 말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를 바르게 하지 못하여, 일종의 기도의 한 유형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복을 비는 뜻을 담은 말로 대체한 것일 뿐 아니라, 또 다른 한편으로 젊은 목사가 나이 많은 노인 성도들에게“있을 지어다”라든지“원하노라”는 선언적 표현이 윤리적(倫理的)인 어감(語感)이 부자연스럽다고 하여, 기원(祈願)적인 표현형식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복의 선언”은 목사의 고유적 직능이기 때문에“있을 지어다”라는 선언적인 표현은 윤리적(倫理的)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대리적인 입장에서 선포(宣布)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복의 선언”은 기도의 유형이 아니므로“축도”라는 말로 바꿀 수가 없다.“축도”의 단순한 뜻으로는“빌고 빈다”의 뜻이니, 하나님께 기도하는 (복을 비는) 형식은 모두“축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예배를 마감하는 순서로 목사가 손을 들어 성도들에게 복이 있기를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목사에게 부여된 복의 위임을 행사하는 것이니, 기도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므로 선포인 것이다.

 (고후 13:13)에“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에서 ① “은혜”“헤 카리스”(? χ?ρι?)는“그 은혜”라는 말이 문장 첫머리에서 그것도 관사“헤”(?)가 대문자로 기록되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왜 성부하나님의 사랑을 첫 머리에 두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두었는가? 이것은 아마도 현실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은혜의 귀중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는 현실적인 삶에서 가장 귀한 최고의 축복이다.

 ②“하나님의 사랑이”“헤 아가페 투 데우”(? ???πη το? θεο?)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다. 이 사랑은 (요 3:16)의 독생자를 주신“이처럼”의 사랑을 의미한다.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은혜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그 사랑”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으라는 것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요일 4:19), 그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거저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있으라는 뜻이다. 참으로 오늘의 악한시대에 머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必要)한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③“성령의 교통하심이”에서“교통하심”“헤 코이노니아”(? κινων?α)는 오직 성령과만 소유할 수 있는 친밀한 교제와 밀접한 관계를 의미한다.“코이노니아”(κοινων?α)는“합동, 교제, 밀접한 관계, 관대, 동정, 선물, 같이함, 나눔”으로써, 실로 많은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그리고“코이노노스” (κοινων??)는“친구, 동참자, 참여자”란 의미이다.

 이와 같이 성령님은 우리의 진실(眞實)한 친구(親舊)로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나누어주며, 그리스도의 끝없는 은혜를 입도록 하여주시는 분이다. 성경에는 복을 선언하는 두 가지의 형식이 있다. 하는 구약의 대제사장 적인 복의 소원을 선언하는 형태가 있고(민 6: 24-26), 다른 하나는 신약의 사도적인 복을 선언하는 형식이(고후 13:13)있는데, 현대교회의 복의 선언의 근거를 삼는 것은 후자이다.

 이러한 예시적 근거는 모두 기도체가 아니고, 선언체인 것이므로 기원적인 체로 구성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성자, 성부, 성령님의 칭호 앞에 광장(廣場)한 삼위하나님의 속성을 형용사로 수식하여 기도를 하며, 또 성경말씀을 낭독하고,“복의 선언”의 표현양식의 혼란을 일으켜, 선언마무리에서 “축원하옵나이다”라든지“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라는 등의 선언 체도, 기원 체도 아닌 어색한 어형(語形)으로 마감하는 사례를 자주 보게 되는데, 각별한 유념이 있어야 하겠다.“복의 선언”은 두 가지의 신학적인 기능이 있다.
 
 그 하나는 예배를 마감하면서 안수되어 세움 받은 목사가 성도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은혜의 복과, 사랑의복과, 교통(교제)함의 복이 있기를, 복의 임재(강복)를 실제화 되기를 선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의 예배에서 나타난 태도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키 위하여, 세상으로 나아가게 됨을 확인하고, 결단을 다짐시키며 소임을 부여하는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복의 선언”은 소중한 목회적 기능이며, 목사의 직무이고, 예배의 중요(重要)한 요소(要素)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의 선언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는 복의 임재를 목사가“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를 대상으로”(엡 6:24; 고전 16:22) 선언하는 것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목사가“손을 들고”(눅 24:50이 근거)『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온 성도들과)함께 있을 지어다』(고후 13:13)의 사도적 표준형을 오늘의 전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복의 덕목(은혜, 사랑, 교통) 앞에 삼위하나님의 속성적 기능을 해설적으로 수식할 필요는 없다. 은혜의 예수님, 사랑의 하나님, 교통하시는 성령님, 이 이상의 어떤 수식어도 그 언어 속에 다 함유(含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선언적인 어체에 분해 적이거나, 꾸밈이 요구되지 않음을 유념해야한다. “축도”는“복의 선언”(pronouncement Benediction)이란 선언형태로 해야 한다.


                                                      강해 / 이원석 목사(본지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