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면 지옥간다는 말보다
                   제 곳으로 갔다는 말로 대치하자.
                     신원하 교수의 완성된 논문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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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람데오닷컴 천헌옥 목사(사진)는 목회 초년에 당한 어이없는 일이 있다
. 심방을 와 달래서 갔는데 어머니 권사님이라고 소개를 받은 8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계셨다. 그런데 평생 예수를 믿고 권사로 교회 봉사를 잘 하셨던 분인데 예수를 잊어 버렸다고 했다.“다른 것은 다 잊어도 예수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꾸 예수님 예수님 하고 부르세요.”하고 권면했다. 그러자 그 할머니 권사님이예수가 누고?”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필자는 목사 초년병이었기에 이런 사실 앞에 참으로 난감했다. 무슨 말을 하고 나왔는지 아무 기억도 없다. 아마 30년 전의 일이었으니 그때는 치매라는 병명이 나기 전이었기에 노망이 났다는 말로 진단했다. 그 할머니 권사님은 가족이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집을 나가 길에서 아사한 채로 발견되었다.

또 하나의 아픈 추억이 있다. 참으로 친한 친구가 어느 날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평소에 그가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해만 지면 집밖을 나가기 싫어했고 어두움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후배에게서 그런 공갈과 협박을 받았는데 천성이 착한 그는 그런 말을 가슴에 담아두다가 대인기피증 등 노이로제에 걸렸고 결국 페닉 상태에 빠져서 모든 것에서 손을 놓고 우울증이라는 정신적인 질병과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지옥 간다'는 말을 한다. 과연 치매라는 질병에 걸려예수가 누고?”라는 말을 하는 사람과 정신적인 질병으로 인하여 자살을 한 사람에 까지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노망이 났다고 할 당시는 그것이 질병이라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의 뇌세포가 일부 죽어 기억을 망각하는 질병으로 밝혀지면서 치매는 질병으로 분류되었다. 극심한 노이로제와 우울증 역시 질병이다. 질병으로 죽는 것에까지 우리는 지옥 간다는 말로 상처를 주어야 할까 하는 것이다.

"제 곳으로 갔나이다.”

성경에 자살한 사람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 가장 지탄 받는 대표적인 사람은 가룟 유다이다. 성경에는 과연 이 자살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유다의 자살 이후 유일하게 유다의 이름을 거명한 사람은 베드로인데 그는 유다에 대해 말하기를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1:24)라고 했다. 여기이라는 단어는 τ?πο?(t?p?s)인데 단순한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지옥을 가리키는 의미는 없다.

예수님은 유다를 가리켜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6:24)고 아주 완곡하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경 어디에도 자살한 사람을 가리켜 지옥에 갔다는 직설적인 선언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우리보다 신학이 약하고 잘 몰라서 그랬을까?

지옥에 갔다는 말은 참으로 무서운 선포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나 하실 수 있는 선언이다. 죄인인 사람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을 가리켜 지옥에 갔다는 말을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성경에서 그런 표현이 없는데 우리가 그런 선포를 한다면 그것은 월권이다. 그러면 뭐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다만 베드로와 같이 제 곳으로 갔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표현이지 않을까 싶다. 그 곳이 어디인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자살은 자범죄이다.

자살은 분명 죄이다. 신원하 교수도 그의 연구초안에서 자살은 죄라고 단정했다. 자살도 분명 범죄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범죄이다. 그는 그 죄를 회개할 틈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과연 회개할 틈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효력이 적용될 것인가는 신교수가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잘 밝혀 줄 것이라 믿는다. 자범죄 때문에 이미 원죄를 용서 받은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논리는 연구를 해볼 가치가 있다.

다만 제언하는 것은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보다는 '제 곳으로 갔다'는 말로 대치해 썼으면 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가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신원하 교수가 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자살가족의 목회적 돌봄과 과제에서 그의 의중을 살펴 볼 수 있다.

남은 자들을 위하여

우리는 과연 뒤에 남은 슬픔에 빠진 가족들에게 자살은 지옥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목회자가 과연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안 보이는 공간(특히 인터넷)에서는 용감하게 잘라 말하겠지만 자신의 가족이나 교회의 성도 중에 그런 자가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렇게 해야 하는가?

페이스북을 하면서 깜짝 놀라는 일이 있다. 그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누구누구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만 한 사람이라고 뜨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놀란다. 본인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알고 있는 친구의 친구를 통해 연결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따지고 보면 남이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렇다면 한 마디의 말은 자신도 모르게 퍼지고 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주 안에서 한 형제이고 자매인데 우리는 남은 가족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감싸 안아야 하지 않겠는가? 눈에 안 보인다고 인터넷에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상처를 받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 설교에서 혹은 인터넷에서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을 듣거나 본다면 남은 가족들의 마음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생체기를 다시 긁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냥 제 곳으로 갔다고만 말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지 않겠는가하고 생각해 본다. 문둥병이라는 단어가 상처가 된다고 한센병이라고 해 달라는 청원은 우리가 곱게 받아들이지 않는가?

죽은 자들에 관한 평가나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는 남은 자들에 대한 보살핌과 위로자로서 저들을 격려하며 함께 영생의 길을 가는 것만이 의무요 책임이다.

자살을 예방하는 것은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은 자살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지막지한 말로 자살을 예방하려는 태도는 마치 몽둥이를 들고 위협을 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자살을 예방해야 한다.

가족 중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병원 치료를 받게 하거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큰 사랑으로 그를 감싸 안아야 할 것이다. 또한 자살자를 가진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그를 감싸 안으면서 위로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할 일일 것이다.

신원하 교수의 글은 의외로 평신도들에게서 난타를 당하였다. 신학자의 글에 대한 평은 신학자가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한다. 신학자들의 견해의 차이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박의 글이라도 논리적으로 어떤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반박하고 토론해야 한다.

댓글도 예의를 갖추어 써야 한다. 마구잡이로 감정풀이를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야한다. 말과 글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차근히 그의 주장을 살피지 않고 애초에 난도질을 해버리면 신학자들도 사람인지라 움츠리게 되고 무엇을 말하기에는 대단한 용기를 내야 하는 그야말로 옛날보수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어진다. 우리는 신학자들이 마음 놓고 연구한 바를 발표하고 토론을 거쳐 하나의 신학이 정립될 수 있도록 협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코닷 편집자 천헌옥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