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태 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 손석태 박사
뉴욕대학교대학원 철학 박사
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한국개혁신학회 자문위원
한국성서고고학회 부회장
한국개혁신학회 회장
여자에게 안수하여 성직을 허락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요사이처럼 여성들의 교회내에서 역할과 그 영향력의 비중이 커감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제기되고 있으며, 특히 보수적인 교회 내에서는 향후 그 결정을 놓고 격론이 벌어질 전망이다.
이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현실적인 필요를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교회 내에 여성이 숫자적으로 많다. 따라서 여성들이 당회, 노회, 총회 등의 치리회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여야 한다. 여성들이 설교나 교육을 남성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여성들이 분쟁하는 교회에 조정 역할을 더 잘 할 수 있다 등의 이유를 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논의할 때는 항상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류에 따라 성경의 원리에 반한 정치 조례를 만들고 헌법을 뜯어 고친다면, 그것은 성경을 배격하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배격한다면 그러한 교회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1. 하나님의 창조 원리
우리가 여성들에게 성직을 부여하는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가장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성경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의 원리와 여성의 지위이다. 교회 내에서 여성의 성직 수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남녀는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는 하나님-사람-만물의 질서가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만물의 통치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에게 위임하시고, 대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그를 섬기고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주셨다. 바로 이러한 뜻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남자로부터 여자를 지으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이 때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이다(딤전 2:13-14; 고전 11:8-9).
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관계의 권위와 순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같은 사실을 살펴볼 때, 이 세상에 권위 체계의 질서가 있듯이 가정에도 같은 질서가 있고,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대표자이듯이, 언약으로 맺어진 가정에도 남자가 언약적 대표자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먼저 따먹은 여자에게서 먼저 묻지 않고, 가정의 머리인 남자에게 물으셨다. 이 같은 해석을 신약에서는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니,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를 원한다”(고전 11:3)라고 가르친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질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딤전 2:12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사도적 권위로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여자는 조용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즉 교회 안의 모든 치리와 선포하는 장로의 직분에서 여자를 제외시키는 것은 명백하고 확고한 성경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2. 성직자의 범위
두 번째로 우리가 여성에게 성직을 부여하는 안수 문제를 논할 때 생각해야 할 점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직자의 범위이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다양하다. 제사장, 레위인, 선지자, 사사, 나실인, 느다님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다 성직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성직자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정한 절차를 밟아 위임식을 하고, 전 생애를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종사하며, 이를 위하여 백성들이 바친 예물과 제물과 십일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실인이나 느담님은 성직자가 아니며, 선지자도 성직자라고 볼 수 없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항존직이라면 선지자는 임시직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선지자가 없었던 시기가 있던 시기보다 훨씬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필요한 경우에 선지자들을 보내어 백성들을 일깨우는 일을 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였으므로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입”이라고 하였다.
제사장은 세습제였으므로 성직자로서의 검증이 까다롭지 않았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지자는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 스스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해야 했고, 사람들로부터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이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했다.
그들은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이었다. 그 선지자들 가운데 여성의 경우는 구약 1500여년 역사 가운데 불과 몇 사람뿐이다. 출애굽 시대의 마리아(출 15:20), 사사시대의 드보라(삿 4:4)나 요시야 시대의 훌다 (왕상 22:14: 대하 34:22), 노야다 (느 6: 14), 이사야의 아내 (사 8:3) 등이 전부이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비상시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무를 주어 실행케 한 자들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본질적으로 제사장과 그 직무가 다르며, 여선지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들을 가리켜 성직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오늘날 여성들의 목사 안수의 근거를 구약성경의 여선지자에게서 찾는 것은 잘못이다.
3. 구약의 제사장직과 신약의 제사장직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네 아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제사장으로 정하셨다(출 28:1). 아론은 모세의 입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며,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는 훌과 함께 기도하는 모세의 팔을 떠받쳐 내려오지 않도록 하여 여호수아의 승리를 뒷받침한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제사장으로 임명하기 전에 그는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사장의 할 일은 백성들을 대표하여 여호와께 나아가 제사 드리는 일과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과 질병의 진단과 처방은 물론 각 종 범죄에 대한 수사와 판결의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일정한 절차를 따라 위임식을 했으며, 특별히 디자인한 제사장 복과 모자를 썼으며, 제사장복 앞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각 종 보석으로 만든 가슴패를 달고, 하나님을 뜻을 분변하는 데 사용하는 우림과 둠밈도 지니고 다녔다.
제사장들은 여호와께 일 년된 어린 수양을 아침저녁으로 회막 문에서 번제로 바치는 일을 대대로 해야 했으며, 이때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겠다고 하였다(출 29:34). 레위인들에게는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생활비로 주어진 반면, 제사장들에게는 백성들이 여호와께 바친 제물이 그들의 몫이 되었다. 이러한 제사장직은 세습되었다.
따라서 선지자는 여자가 가끔 있지만 제사장은 여자가 없다. 제사장직이 세습되었기 때문에 후기 유대 사회에서 제사장의 아내는 엄선되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후손들에게 “소금언약”과 “평화의 언약”을 주셔서 영영토록 그들의 제사장직을 보장해주셨다(민 18:19; 25:12-13).
이 대제사장과 대제사장직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모형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스스로 성전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제사와 제사장직을 완성하셨다.
예수께서는 영원히 계시고 영구적인 제사장 직을 가지고 계시므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수 있으니, 그분은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히 7:23-25)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히 계시고 영구적인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단번에 드려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희생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히 7:27).
그리스도께서 아론의 후손들처럼 불완전한 제사를 드리는 제한적인 제사장들과는 다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론과 그 후손들과 같이 매일 짐승의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하는 제사장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제사장과 목사 사이에는 포괄적인 직무상의 연속성이 있다. 예수께서는 붙잡하시기 전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시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새 언약을 맺으시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하셨다(눅 22:14-23).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시행하며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재림할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1:23-26).
또한 부활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흩어졌던 열 두 사도를 부르시고, 이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베풀며, 그가 가르치신 것을 지키도록 하라는 명령을 주셨다(마 28:16-20; 행 1:8). 이 명령을 받들어 제자들은 나아가서 말씀을 선포하고, 제자들에게 안수하여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고 성만찬을 집전하는 이 예식은 분명 선지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사장적 직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똑같은 대제사장적 직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영적인 제사장직을 위임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자신의 직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하고, 그리하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 일이 성령 안 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롬 15:16)
여기서 분명 사도 바울은 이방인으로 예수를 믿게 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이 일을 마치 구약성경에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의 직무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사 61:6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를 “여호와의 제사장,” 그리고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러 나오는 이방인들을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들”이라고 말하는 말씀에 대한 성취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직무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장직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여성들이 많았지만 제사장적 직무를 위하여 여자들을 사도로 세우시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그의 사도로 세우실 때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4. 신약성경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가르침
다음은 신약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하여 딤전 2:11-15, 고전 14:33하, 34, 38, 그리고 고전 11:1-16에서 사도 바울이 잘 다루고 있다. 바울은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오직 여자는 조용해야 한다.”(딤전 2:11)고 말한다. 그는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이 말은 여자가 어떤 사람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고 교회 내에서 남자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 “이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그 다음에 하와가 창조되었으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임을 당하여 죄에 빠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창조의 질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 권위의 체계를 정하셨으며, 이 권위 체계의 파괴가 결과적으로 이 세상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세우신 권위 체계는 남자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여자는 그의 돕는 배필이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시기 전에 아담은 생물들의 이름을 짓고 있었고(창 2:19), 모든 가축과 하늘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의 이름을 불렀다(2:20).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아담에게 돕는 자가 필요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만물에게 이름을 짓고 있는 아담을 위하여, 아담으로부터 여자를 만드셨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영광이기 때문에 머리에 쓰면 안 된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고전 11:7)라고 말한다.
남자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남자의 언약적 대표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반면에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여자를 통하여 남자의 영광이 들어난다는 의미이다. 고전 1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권위 체계 가운데 여자는 결코 남자와 동등하지 않다. 예수께서 복음 사역을 하실 때 예수께 가장 충성했던 사람들이 여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당대의 가장 급진적인 개혁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여자를 그의 사도로 세우시지 않았다.
고전 11:5에서 바울 사도는 여자의 예언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하거나 예언을 하면, 자기의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자기의 머리를 밀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씀을 유추해보면 여자도 예언을 할 수 있는 데 그때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것이다. 흔히들 갈 3:28의 말씀을 인용하여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여자에게도 성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여자도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갈 3:28의 인접본문은 성직이나 설교에 대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에게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양자됨에 대한 무차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설교에 있어서 남녀 차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예언을 설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아무튼 그것이 설교이든지 가르침이든지 황홀경 속에서 하는 방언이든지 간에 이것은 본질적으로 선지자적 행동이다. 이들이 세례를 주고, 성례를 베푸는 제사장적 활동은 아니다. 따라서 고전 11:4-5의 여자들에게 예언을 허용하는 말을 확대 해석하여 여성들에게 목사 안수를 하고 강단에서의 설교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14:34에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여라. 여자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으니 율법이 말하는 것같이 여자들은 복종하여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예 입을 다물고 살으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공적인 의사 전달을 의미하며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예언이나 교육활동과 다른 차원의 의사표시이다.
복종과 관련된 것이라면 교회 내의 공식적인 회의라고 보아야 한다. 바로 이점이 당회나 노회와 같은 치리회의 구성에 있어서 여성의 참여를 제한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집사의 직무와 가르치는 직책에 대하여 여성들을 포함시키는 명백한 구절들이 성경에 있다.
나이든 참과부들을 교회의 명부에 올려 교회에서 봉사하게 하고 이들을 구제했다(딤전 5:9-16). 딤전 3:11에는 집사들의 자격을 열거하는 가운데 “여자들도 존경할만하고 ... 신실한 자라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여기서 여자들을 “아내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여자 집사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뵈뵈는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인 우리 자매 뵈뵈”라고 지칭하고 있다. 일꾼이라는 말을 “집사”와 의미가 같은 "디아코노스"(dia,kono?)가 사용되고 있다. 행 18:18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부부로서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개인지도했다.
이같은 기록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집사의 직분 및 여자들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초대 집사들처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하여 세웠는지는(행 6:6) 알 수 없다.
결 론
이상을 살펴볼 때, 여성에게 성직을 맡기는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창조 세계에 계시하신 질서 안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남자를 그가 창조한 피조 세계를 다스릴 언약적 대표자로 세우시고, 이를 돕는 배필로써 여자를 창조하셨다. 따라서 언약적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에서는 남자가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대표성을 가지며, 또한 언약적 연대성 때문에 여자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축복과 저주가 남자에게 달려 있다.
또한 신구약 성경에서 성직의 연속성을 논할 때, 목사의 경우 그 직무는 제사장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의 안수나 성직에 관해 말할 때 구약 성경의 여선지자나 신약성경의 예언 활동을 했던 여성들로부터 그 정당성을 찾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제사장으로부터 직무의 연속성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결국 여성들은 제사장적 직무를 행하거나 치리회의 주관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 여자들에게 교회 내에서 예언 활동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는 반드시 머리를 덮도록 명하고 있으며, 교회 내에서 각종의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허락할 수 있다.
출처 코람데오닷컴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에 대한 안수를 반대하는 학자나, 찬성하는 학자나 양쪽 모두가 과연 성경에 합당한 주장일까요?
디모데후서 3:16과 고전2: 10절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감동, 즉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성경을 바로 이해 할 수 없는 말씀이므로 학자들이 쓴 성경 해석을 너무 의지 하다 보면 영적인 면을 놓치게 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1). 여성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보니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35절을 많이 인용합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거심이니라" 하였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2장 11절과 12절도 많이 인용을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임))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 말씀에 근거하여 여자가 가르치면 안되기 때문에 여성목사나 여성장로 안수를 반대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고린도 교회와 에배소 교회가 너무도 부패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여성 성도들에게 명한 명령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부패하였나 하면 고린도전서 5장 1절에 의하면,
아비의 아내 (즉 어미)를 취하여 사는 자가 있을 정도로 도덕이 타락하였으며, 뒤집어 말하면 어미가 늙고 병든 남편과 이혼하고 자식을 데리고 살았다는 부도덕한 현실이었습니다.
또 에배소에는 마술이 성행하고, 수많은 우상들이 가득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에배소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위한 인내와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 5).
고린도 교회와 에배소 교회의 여성 타락 상은 감히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여자의 인권은 아예 무시하든 시대이기에 사회에서 무시 당하던 여성들이 교회에 나아오니 남녀 차별이 없이 동등한 인격으로 대해 주고 또 여성 성도들이 많은 방언 은사를 받고 그 방언을 통제하지 못하여 교회 질서가 혼돈하여 무너지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에 한하여 여자들은 입을 다물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당시에 온 교회에 주의를 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말씀이 온 교회에 적용이 되는 경고(Warning)라면 교회 마다 다 이 편지를 다 보내야 옳았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여자 사사와 여자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특히 여성 선지자 홀다는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요시아왕의 신하들에게 율법(성경)을 가르쳤는데 그것도 책망 하는 투로 격앙된 목소리로 가르쳤습니다 (왕하 22:13-20).
당대에 최고 학자요 율법의 대가인 사도 바울이 그런 여 선지자 홀다를 몰라서 고린도 교회와 에배소 교회의 여 성도들에게 심한 말로 입 닥치라고 야단을 쳤겠습니까?
거듭 말씀 드리지만 당시 고린도 교회와 에배소 교회에만 그런 주의를 주었다는 사실을 이해 하시기 바랍니다.
또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학자들이나 목사님들의 말 대라면
여성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목사님들의 교회에 여자 전도사, 여자 권사, 여자 집사, 여자 교사, 여자 성가대원있으며 심지어 여자 대표기도 등이 있는지 매우 의문입니다.
성경에서 금지한 여성 직분을 다 세우면서, 굳이 여성목사나 여성장로 직은 허용 할 수 없다는 논리를 설명 하시기 바랍니다.
2). 한편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지지하는 학자들의 말은 더욱 비 논리적입니다.
시대적으로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가 필요하다고 주장을 합니다.
시대적으로 필요하다면 이시대 여자 목사는 정말 필요 없는 시대 입니다.
왜냐? 하면 오늘날 남성 목회자만 있는 교회가 부흥하고 잘 운영이 되고 있는 교회도 많으며 또 여성 성도의 인격을 무시하는 교회는 없으며 수많은 여 성도들이 은혜 생활을 잘하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여성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3). 결론적으로 여성 목회자의 문제는 필요하다, 아니다가 아닙니다.
주님이 죽어 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으므로 제사장 직분을 행할 제사제도가 없어지고, 그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벧전 2:9) 만민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를 가리켜 만민 제사장이라 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제도가 마감되고 제사장은 폐하여 졌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여 제사대신 주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예배 모습인 것입니다.
그르므로 여성 목회자에 대한 시 시비는 말도 안 되는 논리입니다.
여러분!
본당의 목사님께서 서서 설교하시는 단상을 제단이라 합니까? 강대상이라 합니까?
제단이 아니고 강대상이라 합니다.
그 이유가 오늘 날 성도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여 감사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모든 목사님들의 설교는 주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것이므로 강대 상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강대상에서 강론 하는 일은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구별 없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도 신학을 공부하고 자격을 갖추면 강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교단에서 여성을 목사로 장로로 세우는 일은 대단히 옳은 일입니다.
여성안수 문제에 있어서는 더 이상 보수다 진보다 따지지 마시고 안수하시기 바랍니다.
글 쓴이 아모스회.
* 예 할 때 예 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하라"(마5: 37). “아멘”
* 각 신학교 여학생들은 여성안수에 대하여 교단에 강력히 요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