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윤실 주광순 자료.jpg
  공동체 운동을 하셨다. 물론 기장측이라는 점에서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보기에 교리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다. 당시에 안내양들을 선교하면서 사회적인 문제들을 목도하던 나에게 '주님 같으시면 지금 무엇을 하실까' 하는 물음은 굉장히 시급한 물음이었고, 허목사님처럼 하시지 않으실까 결론 내려 본 적이 참 많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사역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공생애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오신다면 약자들, 타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지만...

어떤 학생운동 하던 분이 지금은 치과의사를 하면서 '젊은 날의 꿈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내용의 제목으로 시집을 낸 것을 보고, 그 제목에 공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청년의 시절에 꾸었던 꿈은 그냥 개꿈이 아니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진리를 따르는 삶이란 새로 발견되는 진리도 있겠지만, 이미 발견했던 것을 망각해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그 당시의 느낌 그대로만 간직한다면 수구적이 되기 쉬울 것이다. 그렇다기보다는 그 정신을 유지한다고나 할까? 그런말이다. 우리가 언제라도 청년 시절에 주님을 향했던 애타는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나에게는 약자, 타자와 하나가 되겠다는 염원이 있었다. 동정하고 도와주고 심지어 이끈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고, 그보다는 하나가 되기를 염원했덨다. 만약에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처럼 '성삼위 하나님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복음을 말하는 자들과 그 말을 듣는 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다'(요17장20~21)면 얼마나 좋을까? 복음 안에서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가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한국인이나 외국인이나 어떠한 차별이라도 다 철폐될 수 있다면 얼마나 주님의 복음이 잘 전파될 수 있을까를 열망해 본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을 알아간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해 간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내 자신을 돌아보아 그렇다는 말이다. 세상을 바꾼다고 해보아도 이미 한계를 정하고 시작한다. 성경 본문에 액면 그대로에 따르기보다는 우리의 살아온 날들의 타성이 우리의 꿈을 제한한다. 타락한 인생이 세속 속에 살면서 꼭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현실을 달리 볼 수 있는 시각이다. 우리 기윤실이 정말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운동이려고 한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한계를 모르고 솟아나는 상상력 말이다. 어쩌면 젊은 시절의 꿈도 이 상상력의 일종일 것이다. 현실의 완고함에 제한됨이 없이 성경 본문과 우리가 그대로 맞부딪쳐서 발생하는 상상력, 이를테면 우리가 사회신뢰회복 운동으로 하고자 하는 입시, 정치, 여성문제에 있어서 좀 더 근본적인 변혁을 꿈꾸어 볼 수는 없을까? 입시가 현재의 사회적 신분과 위치를 대물림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기윤실이 이를 넘어서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한국인이나 외국인이나 하나가 되는 데에 기여할 희망은 없을까? 이는 정치나 여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허목사님이 가졌던 꿈을 기윤실 속에서 다시 꾸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