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신찬-유병언 구원파세력 극동방송서 태동

세월호참사의 주범 구원파를 해부한다

 

4 16 세월호 참사 박근혜 대통령이 5 2 청와대로 종교지도자 10명을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 청와대는 자리에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와 더불어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를 개신교 대표라는 명목으로 초청했다.

 

유병언 키운 극동방송.. 세월호 대책 협조?

 

1. 구원파교주 유병헌.jpg

그런데 청와대가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유병언의 소위 구원파 극동방송에서 태동했고 곳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았어도 김장환 목사를 불렀을까? 구원파가 일으킨 참사로 국민적 슬픔을 위로하자는 간담회에 구원파의 모태였던 극동방송의 실질적 대표를 부른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김장환 목사 초청된 종교인들에게 국민이 다시 용기를 갖고 일어설 있도록 많은 힘이 돼주기를 부탁드린다 당부했다. 과연 청와대는 구원파와 극동방송의 특수한 역사적 관계를 몰랐을까? 그렇다면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히 종교담당 비서시스템에 심각한 파공이 것이라고 수밖에 없다.

 

유병언 . 권신찬 씨의 사위이며 후계자다. 1980년대 초반 이후부터 그들의 핵심 추종세력으로부터 구세주를 의미하는 그분으로 은밀하게 불린 인물이다. 해운, 부동산, 유통 수많은 기업의 실질적 지배주이고, 국민을 경악케 했던 박순자의 오대양 사건과의 연관성을 의심받는 자이다.

 

그러한 자들이 2014 4 16 국민을 경악케 하는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다. 그들의 탐욕과 반생명적 작태로 292명이 사망됐고, 아직도 12명의 시신을 조난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역사가 세월호 참사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정도로 충격은 컸고, 언제까지 트라우마로 이어질지 모를 지경이다.

 

구원파는 1961 4 미국인 독립선교사 (Dick) 통하여 복음을 깨달았다는 유병언 씨와 같은 11 네덜란드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 통하여 사함을 깨달았다는 권신찬 씨에 의해 대구에서 시작했다. 1963년경부터 이들은 선교사들과 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을 걸으며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예장통합 경북노회 소속 목사였던 권신찬 씨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기념해 침례를 다시 받은 등이 문제가 1962 목사직을 면직 당했다. 이들 그룹은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 , 며칠, 시에 구원 받았습니까?라고 묻기 때문에 구원파라고 불리게 됐다.

 

극동방송, 권신찬-유병원의 구원파 키운모태

경북노회로부터 목사면직을 당한 권신찬 씨는 독립교회로 전전하다가 1962 2 10 동향인 심남섭 (당시 총무부장) 추천으로 극동방송의 전신은 인천복음주의방송국 전도과장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씨는 방송의 프로그램에서 은혜의 아침이라는 설교를 맡아 매일 아침 방송설교를 하며 자신들의 오도된 교리를 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극동방송 전신인 인천복음주의방송국 정통교회로부터 목사면직을 당한 인물을 전도과장으로 발탁했을 아니라, 설교방송을 맡겼다는 사실. 목사도 아닌 사람을 설교자로 활용한 방송의 정체성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당시 씨는 잘못된 신앙과 침례문제로 논란이 됐던 터였다.

 

방송설교를 청취한 이들이 경도된 신학사항에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종자 그룹이 생성됐다. 권신찬 그룹은 이를 청취자 수양회로 엮어 나갔다. 서울 불광동의 수련원에서 매년 여름 청취자 수양회를 열면서 자신들의 구원파 교리를 전했다. 그리고 수양회에 참석한 이들을 추종세력으로 조직해 나갔다.

 

<기독교언론 공동취재단> 이와 관련, 극동방송 측에 유병언 권신찬 씨와 극동방송 관계를 묻는 공개질의서를 띄웠다. 이에 대해 극동방송은 김장환 목사가 극동방송을 운영할 권신찬 씨를 만난 적이 없다 등의 내용이 담긴 답변서를 지난 5 21일로 보내왔다.

 

극동방송은 답변서에서 당시 극동방송의 운영주체였던 미국 복음주의동맹선교회(TEAM) 거듭남, 죄사함, 복음을 깨달았다 표현에 미혹돼 유병언을 극동방송 부국장에 임명했고, 1969 그의 장인인 권신찬을 방송부장으로 임명했다 밝혔다.

 

TEAM선교회가 둘의 구원파적 사상에 미혹돼 방송의 중요요직에 임명한 것과, 장인보다 사위를 높은 보직으로 세운 것도 의아한 점이다. 당시 대중적 인기를 받았던 사람은 유병언씨가 아닌 권신찬씨였기 때문이다. 극동방송에 따르면 이들은 1972 극동방송의 시스템 변화에 따라 그해 11 팀선교회와 쌍방계약을 체결했다.

 

극동방송의 해명.. 그리고 제기되는 의문점

극동방송은 구원파가 한국어방송을 담당하게 것은 1972 11 팀선교회와 구원파의 쌍방계약에 따른 이라며, 팀선교회는 세계적인 오일파동으로 미국의 헌금이 급감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밝혔다. 권신찬이 청취자와 구원파의 헌금으로 극동방송을 운영하겠다고 제안해 12명의 직원이 함께 입사했다 것이다.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예장통합 주류교회가 둘의 극동방송 설교와 운영에 대해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음에도 팀선교회가 이들을 운영주체로 세우는 계약을 체결했느냐의 문제다. 극동방송의 답변은 이어진다. 이들의 방송내용에 대한 예장통합 한국교회 교단들의 반발과 이러한 기류에 대한 팀선교회의 인식으로 1974 7월말로 유씨와 권씨를 포함해 구원파 직원은 모두 해고되었다 밝혔다.

 

이어 구원파 일당은 해고가 되기 , 이사회의록 위조 극동방송 탈취계획을 진행했다면서, 이에 팀선교회 측은 임시이사 결정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으나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설명했다.

 

의문은 계속된다. 극동방송 측은 팀선교회가 예장통합 측의 반발로 1974 그들을 해고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증언과 자료에 따르면 이전부터 예장통합이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은 훨씬 이전부터다. 쌍방계약을 체결했던 1972 훨씬 전부터 논란이 것이다.

 

예장통합 측으로부터 면직을 당해 목사도 아닌 사람과 쌍방계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그가 방송설교를 하도록 팀선교회의 정체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1972 이후 예장통합 등의 반발기류로 그들을 해고했다는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극동방송은 이후, 김장환 목사를 비롯해 교계의 뜻있는 인사들은 극동방송이 구원파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정통 복음주의에 기초한 선교방송으로 정상화됐다, 구원파 파동을 극복하고 당시 아세아방송 국장이었던 김장환 목사에게 운영을 의뢰하게 되었다 해명했다.

 

김장환 목사는 구원파 파동이 모두 매듭 되어진 1977 1 1일에 한국인 최초의 국장으로 취임하게 됐다 설명도 덧붙였다. 극동방송 측은 극동방송을 , 권신찬 씨와 어떻게 처음 만났는가?라는 질의에 대해 김장환 목사님께서 극동방송을 운영할 권신찬 씨를 만난 적이 없다고만 밝혔다. 질문내용에 대한 즉답을 피한 , 초점이 어긋난 답변을 하고 있는 . 극동방송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1977 이후 권신찬-유병언 씨를 만난 적이 없지만, 이전에는 동료로 만났다는 것을 유추해 있다.

 

극동방송 측은 극동방송의 구원파 파동은 정통 복음주의 선교방송인 극동방송을 향한 구원파의 야욕을 드러낸 사건이라며, 극동방송은 사건의 피해자이며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구원파와 무관함을 확실히 밝힌다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극동방송이 권신찬 유병언 씨를 키운 모태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극동방송 김장환 목사 측이 이들과의 관계에 대해 선을 긋고 있지만, 적어도 1974 이전에는 이들의 동료였던 또한 드러나는 사실이다.

 

1969 3 개헌 당시 조용기, 김준곤 목사 242명이 지지성명을 김장환 목사도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 그만큼 당시 김장환 목사는 이미 극동방송에서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었다.

 

과연 김장환 목사는 유병언-권신찬 그룹을 전혀 알지 못했을까? 알았더라도 교류가 전혀 없었을까? 현재까지 극동방송은 구원파에 대한 김장환 이사장의 관계 태도만 밝혔을 , 구원파 세력의 모태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한국사회나 교회에 이렇다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