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

“1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장 11-21절                                                        석기현 담임목사

 
 우리나라에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할 무렵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분은 그 인기가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고 있던 어떤 유명한 여자 CF모델 바로 다음가는 2등으로 여론조사에서 발표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나라를 IMF로 망쳐 놓고 떠나게 되었을 때에는 예전의 그 하늘 높이 치솟던 인기란 것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의 대통령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인기 위주의 표몰이를 해서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가, 집권 이후의 실정과 유치한 언행 등으로 국민을 실망시키곤 하는 패턴만 반복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잠시 동안 인기를 얻은 것을 가지고 끝까지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용두사미의 대통령'이 아니라, 퇴임하고 나서도 여전히 '자랑스러운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 있는 국가의 지도자를 모시고 싶은 것이 모든 우리 국민들의 간절한 소원일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일국의 통치자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 즉 목사를 비롯한 모든 교역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목회자 상(像)에 대하여 11절과 12절에서 "11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12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라는 말처럼, 교역자는 뭐니 뭐니 해도 일단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교인을 대할 때에도 항상 진실한 마음과 겸손한 모습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매사에 '하나님 경외'의 신앙자세를 지키고 있던 사도 바울은 이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진짜 두려워하는 교역자는 자기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어떤 자세로 사역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성도들을 돌보고 있는지, 간단히 말해서 자기가 실제로 '어떤 목사이며 어떤 전도사인지'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드러나 있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드러나 있는 자신의 됨됨이가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이 어떤 사도인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전도자인지 하나님께서 아시는 그대로 고린도교회 교인들 역시 알아주기를 바랐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즉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자기가 어떤 사도인지를 바로 알아 달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자신을 스스로 높이기 위한 제 자랑은 아니라고 양심선언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지금 이런 말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하고 있는 진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그것이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그들이 진짜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교역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 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가짜 목회자들이 그 당시의 초대교회들 안에 수두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 혈통, 사람들과의 친분 관계, 유명한 사람들의 추천서 따위를 자랑하면서 '목사 한자리'를 얻으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고린도교회 안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정말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진짜 사도가 어떤 자인지, 마찬가지로 '교인들도 알아주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진짜 목회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하의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목사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며 어떤 교역자가 교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진짜 목자'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십자가로써 죄를 대속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자신이 먼저 감화감동 받은 교역자를 교인들이 '알아주어야' 합니다. 13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에 "1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불신자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 앞길 창창하던 출세가도를 다 내버리고 오직 예수 십자가만 전하면서 온 로마 제국을 돌아다니는 초라한 전도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정말 미쳐도 보통 미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어디까지나 "정신이 온전한"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말한 대로, 진짜로 미친 사람이라면 교회를 다스리고 성도를 돌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 바울은 그처럼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가 되었으며,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온갖 조소와 비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아예 죽을 각오로 충성하는 사도가 되게 만들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강권하다'라는 말은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휘어잡다' 혹은 '조정하다'(control)라는 뜻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부터는 바로 그 분의 '사랑의 줄'에, 그 '은혜의 사슬'에 꽁꽁 묶인 존재가 되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14절 하반절 이하에서 더 자세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통하여 나타난 사랑이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그 원죄로 말미암아 원래 "모든 사람은 죽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그 죽었던 생명을 살려 놓으시고, 이제부터는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면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 즉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 영생할 준비를 하면서 살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14절과 15절에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이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듯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란 것은 도저히 찾을 수도, 생각해 볼 수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을 알게 된 이후로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아는 방법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6절의 "육체대로"라는 말은 '세속적으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라고 한 대로, 이런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을 알기 전까지는 바울도 사람의 세속적 논리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판단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기독교를 천하에 다시없는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그처럼 열렬히 교회와 성도를 박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십자가에서 죄인 대신 죽으신 사랑을 통하여 알게 되는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눈이 뜨인 날 이후로 사도 바울은 그야말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그 사랑의 달콤한 맛이 없으면 하루도 살맛이 없는, 그 사랑의 힘이 없으면 단 한 가지 일도 할 수 없는, 아주 싹 바뀐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사도 바울을 '강권'하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충격과 충동을 받은 것이 그의 목회의 동기가 되었고 매일의 사역에 새로운 힘을 충전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저 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나 무슨 학력이나 아니면 무슨 인맥과 연줄 따위를 가지고 자랑하던 거짓 교사들, 즉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과 이런 바울을 서로 잘 비교해 보고, 정말 어떤 주의 사자를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지를 제대로 판단할 줄 알아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목사를 비롯한 모든 교역자들은 먼저 자기 자신부터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을 통해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화감동을 받고 그 은혜의 힘에 이끌려 사역을 할 줄 알아야 하며, 교인들은 바로 그런 교역자들을 '알아보는' 영지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교회에는 여전히 그저 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나 무슨 학력이나 아니면 인맥과 연줄 따위를 가지고 자랑하는 '거짓 교사들', 즉 '외모로 자랑하는' 목사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주어" 그런 거짓 교사들과 잘 비교해 보라고 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교인들도 교역자들을 이렇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체험'이 없는 목사는 교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주는 기쁨을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자기도 소유하지 않고 있는 것을 어떻게 남에게 나누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십자가 사랑이 강권하는 힘'에 이끌리지 않는 전도사는 그 전도와 심방의 사역에 아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삯군이 시간을 때우려 하는' 일에 불과하니 거기에서 어떻게 구령의 역사가 나타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개척교회를 섬길 때 어느 교인과 상담하던 중에 "목사님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분이신 줄을 제가 압니다."라는 말을 듣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까지 목사로서 듣게 된 최고의 칭찬이었습니다. 정말 부족하고 불충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예수님 사랑'만큼은 분명히 간직하고 있는 목사라고 교인들이 '알아준다'는 사실은 제게 엄청난 격려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외모로 자랑하는' 교역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는' 목사와 강도사와 전도사님들을 세워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들을 진정으로 귀히 여기고 존경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사랑으로써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사명에 충성하는 교역자를 교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라는 말씀대로, 사도 바울의 개인 구원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그가 남은 인생을 통하여 받은 사명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란 말씀은 앞에서 보았듯이, 사도 바울이 먼저 개인적으로 몸소 체험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죄인인 사람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어떤 길을 통해서든지 먼저 '화목'하지 않고는 아무도 '새로운 피조물'이 될 길이 없습니다.

이 절대적으로 필요불가결한 '화목'이라는 단계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해결해 주었으며, 사도 바울 역시 이 화목케 하심의 은총을 만끽하면서 구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처럼 '그리스도 사랑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단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며, 그것이 그가 사도라는 '직책'을 받게 된 이유였습니다. 그 직책을 받아 섬겨야 할 사명이란 바로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는 당신과 원수가 되어 있는 죄인에 대하여 그저 마음 좀 풀어 놓으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독생자를 대신 주심으로써 화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목을 이루는 마지막 단계,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다 용서하고 구원해 준다.'라는 이 화목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만큼은 전도자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은 은혜로운 '화목의 말씀'을 전혀 엉뚱한 데에 써먹는 가짜 목사들이 있습니다.

북한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소위 '화목의 복음' 운운 하는 목사들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죄인 위해 대신 죽으신 이 대속 사역이 공산당과 친공분자들의 매국적이고도 반민족적인 행위를 정당화시켜 주기 위하여 행하신 일이라는 말입니까? 성경 말씀을 곡해해도 어떻게 이렇게 곡해할 수가 있습니까? '화목의 말씀'은 김정일도 똑같은 죄인이니까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고 주신 말씀이지, 지금도 수백만의 인민을 굶겨 죽이고 있는 독재자를 두고 '합리적인 지도자' 어쩌고 하면서 기분 맞추어 주고 그 앞에서 굽실거리라고 주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화목의 말씀'은 누구든지 예수 믿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과 원수 관계로 남으면 지옥의 영벌을 받는 길밖에 없으니까 빨리 십자가 공로에 의지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주신 말씀이지, '무신론 공산주의도 인정해 주고 그저 민족만 통일되게 하자.'는 따위의 정신 나간 통일론에 각주로 쓰라고 주신 말씀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은 '직책'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 나라들은 양국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또는 더 나은 관계로 발전하기 위하여 서로 대사를 파송합니다. 그런 대사는 자기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대리하는 사람이며, 자기 이름으로 타국의 통치자를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대통령이 준 신임장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의견을 제시하거나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는 자도 절대로 아니고, 오직 대통령이 전하라고 지시해 준 말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신하'인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전도자들이 바로 그와 똑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머리에 안수하여 목사가 된 사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셔서 교회를 다스리는 '신임장'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사는 자기 말로 설교하고 자기 사상으로 전도하는 자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주신 '화목의 말씀'만을 그대로 전파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바로 이런 '복음의 대사(ambassador)'들을 이 땅에 세우시고 택자들에게 파견하심으로써 그 전달된 복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대사로 파견된 사람은 어찌하든지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쌍방 간이 서로 이해하고 교섭이 성사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사람들을 만나 전도할 때마다 바로 그와 같은 대사의 자세로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진실한 마음으로 간곡히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전달하고자 하시는 '화목의 말씀'이 죄인 쪽에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 얼마나 큰 득이 되는 것인지를 어찌하든지 이해시켜 주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신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 대신 대속 제물로 삼으시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될 수 있게 하셨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고마운 화목의 제의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가 되어라.'고 사람들에게 "간구하는" 사신이 된 것이었습니다.

어느 꽤 유명한 목사님께서 소위 목회 성공담을 말씀하시면서 "목사는 사람을 잘 사귀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의 목회가 보람스럽고 행복하다는 것을 간증하면서 "나는 교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교인들은 저를 또한 무척 사랑해 주십니다."라는 말을 수차례나 반복하는 목사님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물론 목사가 교인과 친해야 하고 교인이 목사를 사랑해야 함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목사의 목회 철학이나 목회 요령이나 목회 목적은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사명은 '하나님과 교인들이 화목하도록 이끄는' 데에 있는 것이지, '목사 자신과 교인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대통령 대접'을 다 받고, 자기가 '대통령 존경'도 다 받고, 자기가 '대통령 기분'까지 다 내는 목사라면 적어도 '하나님의 종'은 절대로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대사'라는 이 고귀한 직분을 받았는데도 그보다 더 높은 상석에 앉으려 하는 목사가 어떻게 죽도록 충성하는 '종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 자신 역시 교우님들로부터 받는 사랑이 정말 분에 넘치는 목사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가운데 지난 6년 동안 저와만 친해지고 하나님과 이전보다 더 가까워진 것이 없는 분이 계신다면, 적어도 그 교인에 대한 저의 목회는 실패한 것입니다. 교역자는 더 사랑하게 되었다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여전히 냉랭하거나 미지근한 수준에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 교인은 사실상 그 교역자와도 헛 사귄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교인의 기분을 맞추고 교인의 사랑을 받으려 하는 목사나 강도사가 아니라, 여러분을 좀 귀찮게 하고 부담스럽게 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어찌하든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 가깝게 만들려 하는 교역자를 정말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과 인간적으로만 친하게 대해 주는 교역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종'이 되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고 권면하는' 교구 전도사님을 모시게 된 것을 진정으로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인들에게 얼마나 사랑 받게 될까?'를 걱정하는 교역자가 아니라,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하나님과 더 화목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섬기고 계시는 교역자들을 정말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선 지도자로서의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행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28절 하반절에서 그의 사역을 가리켜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지키게 하지 않으면 그 백성들이 '장자를 멸하는 자'에게 같이 멸망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멸망하는 천사가 "건드리지 않게" 하려고, 즉 자기 백성이 그렇게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유월절 예식을 지키고 율법의 말씀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그의 전 생애를 다 바쳤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경향의 교역자들 역시 여러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불철주야로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사신'이며 '교회의 사환'들입니다. 만약에 이 분들의 헌신적인 사역이 아니었으면, 여러분이 혹시라도 '삯군 교역자'를 만나거나 '이단 목사'의 가르침을 받았더라면 영락없이 '멸하는 자'에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인들은 자신이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사랑'에 뜨겁게 젖어 있는 가운데 성도들을 '하나님과 화목된 양자'로 세워 주기 위하여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처럼'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며 매일 전도와 심방으로 바삐 다니시는 교역자들을 정말 사랑하고 존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외모로 자기 자랑'하면서 교인들로부터 인기를 끌어 모으려는 목사나 전도사는 우리나라의 대통령들 가운데서도 보았듯이 얼마 안가서 밑천이 다 드러나고 그 인기란 것은 하루아침에 봄눈 녹듯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교인에게 인기 있는 교역자'보다는 '자신부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교역자'가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교인들로부터 사랑 받는 일에 신경 쓰는 교역자는 그 사랑 받는 재미에 취하다 보면 자기가 오히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교인들의 사랑을 가로채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교인에게 마음 좋게만 대해 주는 교역자'가 아니라 오직 '교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교역자'가 진짜 훌륭하고 존경 받아 마땅한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랑'이 자기 속에 충만히 넘치는 가운데 그 '화목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는 교역자들을 진정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모심으로써 날마다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는 일마다 교회중심의 축복이 더 크게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