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횃불"

 창 15장 1-21절                                                             석기현 목사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그렇게 되어 가고 있지만, 제가 미국에 살던 동안 피부에 와 닿도록 절감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그 사회에서는 '신용'(credit)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꼭 재산이나 수입이 많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매달의 집세나 공과금 따위를 제때에 납부하고 신용카드로 지불한 것을 꼬박꼬박 갚아 나가는 것 등 기본적인 것만 착실히 하면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평가점수가 올라가게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신용'만 쌓여 있으면 월세 아파트를 얻는다든지 집이나 차를 산다든지 또는 사업 자금을 대부하려 할 때에 훨씬 더 좋은 조건과 기회가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바로 미국사회인 것입니다. 저 역시 미국에서 살 동안 제 은행 잔고는 몇 천불을 넘기지 못했지만 미국 생활이 한 10년 지날 무렵부터는 꽤 상위급의 '신용 점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파트를 옮기게 될 때라든지 혹은 미국에 갓 이민을 온 교민을 위해 보증을 서 줄 때에 아주 유용하게 써 먹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반대로 '신용불량자'가 되면 그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훨씬 더 어려워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용'이란 곧 본인이 속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고 그 사회가 제공하는 '혜택과 권리'를 누리기 위한 제일의 필수요건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도 그처럼 꼭 지켜져야 할 '신용'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로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약속을 결국 성취 받고야 말았던 아브라함과 그 엄청난 약속을 끝까지 지켜 주시고 끝내 이루어 주시고야 말았던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신용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진정한 '기독신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고 또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주어지는 각양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기 위하여 실로 필수적인 이 '신용 관계'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람 편에서 나타내야 할 '신용'은 인간적인 계산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만을 확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 1절부터 6절 말씀에 "1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부근에 있던 '시날 왕 아므라벨'을 비롯한 '네 왕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자기 조카 롯을 구출해 왔던 사건 바로 뒤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어떤 보복이나 위협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던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안심시켜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는 뜻이며,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제공자'가 되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올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에게 해 주셨던 약속 즉 '많은 자손과 큰 민족'에 대한 약속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시지만 정작 아브라함의 현실은 여전히 "무자"(無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처럼 '큰 민족'은커녕 당장 '아들 하나'도 없는 상태가 오랫동안 계속되자 아브라함은 자기 스스로 '계획'을 하나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는 아브라함의 생각이었습니다.

나중에 창세기 24장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하여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을 불러서 부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모든 소유를 맡은 종'이란 바로 아브라함이 가장 신뢰하는 '청지기'를 가리킵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 집에서 길리운 자" '엘리에셀'이 바로 그 청지기였을 가망성이 높은 것은 당시에는 주인에게 자식이 없을 경우에 자기가 제일 신임하는 종을 양자 즉 "후사"로 삼아서 상속해 주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아직까지도 씨를 주지 않으신 상태에서 과연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하고 초조해 하던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자기 스스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런 섣부른 지레짐작과 계산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단호히 잘라서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큰 민족'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으로 밝혀 주신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네가 늙었다고 해서 그런 편법으로 후사가 이어지게 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너 아브라함의 진짜 핏줄을 통해 태어날 친자식을 통해서 결국 많은 자손과 큰 민족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라는 당신의 엄청난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지금 아들 한 명도 없이 이미 늙은 몸이 된 아브라함으로서는 사실상 믿기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믿기 어려운' 약속을 '믿게' 해 주시기 위하여 아주 감동적인 '시각 교육'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로 "눈을 들어 하늘의 별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약 6천 내지 8천 개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의 숫자가 그 정도가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 이후로도 밤에 별을 볼 때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된 아주 중요한 한 장면이 나타납니다. 바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된 사실입니다. 여기의 "믿으니"라는 단어는 오늘날 우리가 '아멘'이라고 쓰는 말의 히브리어 어원인 '아만'이라는 동사인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믿음'으로써 반응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으로서는 첫 번째이기도 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He credited it to him as righteousness.)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또한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사실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신용'(credit)으로 삼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까 서론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인간사회에서 '좋은 신용'을 쌓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이라고 인정받는 '최고의 신용'을 얻기 위해서는 그저 '믿음'이라는 아주 간단한 단계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 3절부터 5절의 말씀에서도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지레짐작하고 제 딴에는 노력한다면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구원이 결코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빚"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구원해 주신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께서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의 '믿음'만을 실로 은혜롭고도 자비로우시게도 '의인이 되기 위한 모든 신용 조건'으로 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인간 쪽에서 자기 의견, 자기 계획, 자기 노력을 첨부하는 것은 이미 신앙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는 길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 '내가 이렇게 선한 일에 힘쓰면 어떤 신이라 해도 나 같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계산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 스스로의 자만'이요 '신과의 거래'일 뿐인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약속해 주시는 그대로만 전적으로 믿는 것 - 이것이 '신앙'의 원래 색깔이며 본질일 뿐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진정한 자식이 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부모에게 바치는 효성'이 아니라 바로 '부모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모자녀 관계에서 자녀 쪽에서 나타내야 할 제일 필수적인 자세는 그 무엇보다도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 믿고 자기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도 하게 되고 그 부모님을 섬기는 '효도'도 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창조주시요 구원주이신 '하늘 아버지'와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되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이 엄청난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유일한 조건인 '믿음이라는 신용'을 틀림없이 간직하고 분명히 발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편에서 발휘하시는 '신용'은 인간 쪽의 조건은 전혀 상관없이 오직 '일방적으로 맺으신 언약'을 철저히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7절 이하 16절에 기록하기를 "7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8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10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고 재차 상기시켜 주시자, 아브라함은 "내가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받게 될 축복의 언약에 대하여 하나님 쪽에서 어떤 '신용 보증'을 보여 주실 것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에게 몇 가지 짐승들을 잡아 '희생 제물'을 준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 준비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너무 작아서 반으로 가르기 곤란한 "새"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제물들의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제물을 '쪼개어 마주보게' 한 이유는 곧 나타나게 됩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해가 지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깊이 잠든 중에" 있다가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어두움과 같은 큰 두려움이 아브라함을 엄습했다'는 의미로서 바로 하나님의 임재로 인하여 그가 느끼게 된 '경외심의 두려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가 후사를 낳은 후에 또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약속이 완전히 성취될지'에 대하여 더욱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장차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 즉 애굽에서 "그들을 섬기는"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었는데, 그 기간을 "사백 년"이라고 한 것은 430년을 "사(4)대"라는 '대략 숫자'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 그 애굽을 열 가지 재앙 등으로 "징치"하시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에게서 '은금패물과 의복과 물품을 구하는 대로 받아서' "큰 재물을 이끌고" 출애굽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은 관영치 아니함이니라"고 덧붙이신 말씀은, 아모리 족속을 위시한 가나안 본토 민족들에게 범신론, 우상 숭배, 유아 제사, 종교적 창녀 등의 죄가 '관영'하게 될 때까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유보시켜 두셨다가 나중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통하여 징벌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 주신 약속은 그 시기를 비롯하여 모든 세부사항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어김없이 정확히 실현될 것이었습니다.

즉 축복을 받기 이전에 고난의 단계, 인내해야 할 기간이 있다고 해서 그 약속의 최종적인 성취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7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에 "17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실로 놀라운 '언약 확증'의 징표를 보여 주셨는데, 그것은 "연기 나는 풀무" 즉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서 나온 "횃불" 하나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서 '타오르는 횃불'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쪼개어져서 마주 대하고 놓여 있던 희생제물의 한가운데로 지나간' 것은 아주 강력한 '맹세'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족장 시대 당시에는 두 사람이 어떤 계약을 맺을 때에 짐승을 쪼개어 놓고 그 사이로 그 두 명의 당사자들이 지나가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것은 지금 언약을 맺는 쌍방 중에서 어느 한 쪽이 그것을 어기면 그 쪼개어진 짐승처럼 '죽음의 벌'을 받겠다는 맹세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세운 언약' 즉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라고 하신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 반드시 이루어 주고야 마시겠다고 그에게 확약하시고 보증해 주시는 뜻에서 그처럼 '횃불을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게'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 '언약 확증'의 의식은 원래 '언약을 세우는 쌍방이 함께'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오직 '횃불'만, 즉 아브라함은 제외되고 오직 하나님만 홀로 그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은 세상 사람들끼리 세우는 '상호적 언약'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방적 언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아브라함 쪽으로부터는 그 어떤 조건도, 의무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스스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시기 위하여 세우신 '편무(片務)언약'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세우신 '새 언약'이야말로 그처럼 '하나님 편에서 홀로 생명의 상징인 피로써 맹세하신 언약'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원의 언약 역시 우리 사람 편에 해당되는 조건은 아무 것도 없이 오직 '예수 홀로 속하신' '일방적인 언약'이었습니다. 그것도 '짐승을 쪼개는' 대신에 아예 대제사장이신 당신의 순결하신 몸을 십자가 위에서 찢으심으로써 확증해 주신 '피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사역을 기념하도록 성찬식을 제정해 주실 때에도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고전 11:25)라고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일방적인 구원의 언약'을 우리와 맺어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이것이 하나님께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일은 절대로 착오나 차질이 생겨서는 아니 될, 실로 '심각하게 처리해야 할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의 언약을 '홀로' 맺으셨습니다. 그래야만 그 언약이 100퍼센트 틀림없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구원의 언약에 '사람' 쪽도 포함이 되면 너무나 위태로운, 아니 성취 불가능한 언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언약에 포함될 조건을 지키지 못하고 결국 어기고 말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고 맹세한 언약'을 결코 스스로 깨뜨리실 수가 없으신, 실로 '신용도 만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구원'을 위한 언약 체결에 '구원을 받는 죄인'은 아예 포함시키지 않으시고 오직 '구원을 베풀어 주실 하나님'만 홀로 도장을 찍으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학업에 게으른 아들에게 "너 공부 열심히 해서 이번 학기말에 좋은 성적을 내면 이번 성탄절에 네가 원하는 선물을 사 줄게."라고 약속해 주는 것은 그 아들이 타고난 천성을 고치기 어려운 만큼 그 약속이 성립될 확률도 지극히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식 쪽에는 아무 조건도 걸지 않고 그냥 부모 쪽에서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하여 좋은 선물을 사 주어야겠다고 스스로 작정하면 그 마음이 변치 않는 한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쌍방 간의 조건부 약속'과 '일방적인 무조건의 약속', 이 전자와 후자를 비교해 볼 때 그 성취의 가능성이란 그야말로 천양지차인 것입니다. 최고요 완벽한 신용도를 발휘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베풀어 주시는 '일방적 언약'의 강도와 확실성은 사람이 선을 행함 선을 구원받을 조건을 스스로 성립시키겠다는 '상호적 언약'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꼭 깨닫고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미국에 살 때에 텔레비전에서 "당신이 산을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 태산(a big mountain)이 당신에게로 찾아옵니다."라고 어떤 은행을 광고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가 거래하고 있던 은행이 바로 그 광고에 나왔던 더 큰 은행과 '흡수합병'(M&A)이 되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그 광고의 의미는 '지금 당신의 은행이 우리 은행에 흡수합병된다고 해서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은행은 당신의 예금을 비롯한 모든 재정 업무를 완전히 믿고 안심하면서 맡길 수 있는 든든한 금융기관입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즉 절대로 부도가 나거나 고객에게 손해를 끼칠 리가 없는 '태산 같이 믿음직한 은행'이라는 '신뢰감'을 강조하는 광고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성탄의 절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의 '화육강세'야말로 바로 그처럼 '우리가 산을 옮길 필요 없이 태산이 먼저 우리에게로 찾아와 준'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 죄인 구원이라는 최고의 혜택을 아무 조건이나 대가 없이 그저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편에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그 어떤 마음자세나 노력도 보여 주지 않고 있을 때에, 아니 우리는 하나님과 그 어떤 관계나 언약을 맺을 수 없는 '연약한 자'요 '죄인'이요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 편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으로써 이 놀라운 구원의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 편의 '신용도'는 조금이라도 걱정하거나 의심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 할 '신용'은 너무 쉽고도 지극히 간단합니다. 그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뿐입니다.

마치 돈 한 푼 없어도 '신용도'만 좋으면 얼마든지 새 차나 집을 살 수 있듯이, 우리 쪽에 아무 공로는 없지만 오직 '믿음'이라는 '크레디트'(credit)만 있으면 저와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틀림없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맺어 주셨던 최고의 언약을 지켜 주시기 위하여 친히 이 세상에까지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나의 구세주로 믿는 마음으로 영접함으로써 그 언약이 보장하는 금세의 은혜와 내세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