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임(1850~1902)김리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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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구나.바로
         이것이로다.”

 김초시는 미감리회의 존스(G.H.Jones, 趙元時) 선교사가 주고 간 한문 성경을 읽고 <정감록>에서 말한 난세에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곳, 곧 십승지지(十勝之地)를 발견하게 된다.

갑오(甲午), 을미(乙未), 병신(丙申) 3년 동안 세상은 급속도로 변모하고 있었고, 국운이 쇠함에 따라 백성들의 인심도 흉흉해지고 피난민도 늘었다. 1894년 정월, 동학란에 이어 2월에는 김옥균이 살해당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청일 두 나라 군함이 수원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1895년에는 민비 시해사건이, 그 다음해인 1896년 병신년에는 고종 임금이 러시아 공관에 끌려가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때 글 좀 읽는다 하는 이들부터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이들까지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찾으려 애썼다. 김초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는데, 한문성경 첫 글귀에서 그 답을 찾았던 것이다. 십승지지는 ‘계룡산’, ‘전라도 어디’ 등의 장소가 아니라 ‘십자가’에 영생이 있으니 십자가를 믿는 곳이 바로 십승지지라는 깨달음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눈물의 섬 강화이야기>에서 ‘십승지지’에 대해 “한문 신약성경의 첫 단어는 “亞佰拉罕(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데 바로 첫 글자, ‘버금 아(亞)자’를 갖고 풀이한 것이다. 즉 亞자의 가운데 획에서 십(十)자를 찾아냈고 亞자를 상하로 가운데를 자른 뒤 분리시켜 ‘궁궁을을(弓弓乙乙)’ 모양을 발견하였다. 이 같은 전통 도참류 해석 방법론으로 성경에서 ‘십승지지’와 ‘궁궁을을’을 찾아낸 것이다. 한국의 개종 1세대들이 한국의 종교 문화 전통에서 기독교 복음을 수용한 토착적 성경 해석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강화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환과 김초시
이승환은 강화도 서북 해안 서사면(지금의 양사면) 시루미(甑山)마을 출신으로 인천에서 주막집을 하고 있었다. 당시 전도 방편으로 유행하던 계(契)에 들었던 이승환은 계가 깨어지고 나서도 계속 교회를 다녔다.
 
 당시 이승환을 눈여겨보던 존스 선교사가 세례 받을 것을 권했지만 ‘자신이 술집을 하고 있고, 어머니보다 먼저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그 뒤 주막집을 처분한 이승환은 고향인 강화로 내려가 어머니를 전도하고 존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요청했다.  
 
 이승환의 안내로 강화 북쪽 서사면 해안에 배를 정박한 존스는 배에서 내리지 못한다. 이승환의 집인 시루미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다리목의 양반 김초시가 “양인이 내 땅을 밟고 지나갈 시엔 네 집을 불살라버리겠다.”는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이승환은 다리목뿐만 아니라 강화 전체에 영향력이 있는 김초시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고 밤에 몰래 어머니를 업고 배로 달려가 선상세례를 받는다.

김초시는 이승환에게 비록 엄포를 놓았지만 어머니를 몰래 업고 가서 양인과 내통할 만큼 중요한 업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양인 선교사를 직접 만나 그 꿍꿍이를 알아보기로 한 김초시는 이승환을 통해 존스 선교사를 초대한다. 존스 선교사는 갓과 두루마기 차림으로 김초시를 찾아와 ‘형님’이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대했다. 그리고 한문성경을 선물로 주고 돌아갔다.


 복음의 모판을 일군 김초시 일가
 김상임(金商壬)은 1850년 5월 20일, 서사리 교항동에서 태어났다. 경주 김 씨의 후손으로 11세 때 동몽과에 응시해 수석합격하고, 38세가 되는 1887년 강화부 승부 초시(初試)에 등과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강화도 교산리 다리목에서 훈장노릇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1894년 10월, 김상임은 45세의 나이에 존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양반이자 유학자요, 마을의 스승이던 김상임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자 그 파급효과는 컸다. 김상임의 가족은 물론 제자와 다리목과 시루미 마을 주민들도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강화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1895년 4월에는 15칸 초가와 토지를 기증했다. 이로써 시루미의 이승환 집에 모이던 천민들과 다리목 양반들이 한 곳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됐다. 김상임은 기독교로 개종한 뒤 초기 감리교 교역자 양성과정인 우각동 신학회 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강화도 최초의 전도사가 되어 교회 개척에 앞장섰다.

 목사 안수를 받기 네 달 전인 1902년 4월 15일 53세를 일기로, 김상임의 영혼은 그가 깨달은 바대로 영원한 십승지지에 들게 된다.

믿음의 대를 이은 손자며느리 김리브가
김상임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맏아들 김흥제(金興濟) 권사와 둘째아들 김우제(金宇濟) 전도사다. 김우제 전도사는 아버지를 뒤이어 감리교 전도사로 활동했다. 잠두교회 등을 담임하며 강화 복음화에 힘쓰다가 하와이로 건너가 이민목회를 했다. 후에는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다.

김상임이 별세하고 김우제가 하와이로 떠난 뒤 집안 종손들이 미쳐가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예수 믿어 집안이 망한다.”고 수군거렸다. 일제 말기에 접어들자 맏아들 김흥제와 장손인 동만(東萬)도 교회를 멀리했다. 그 때 손자며느리로 들어온 김리브가가 집안의 믿음을 일으켰다. 김리브가의 아버지 김봉일 전도사는 강화중앙교회의 초대교인이다. 1909년 존스 선교사, 손승용 목사와 함께 제일합일학교를 세우는 등 신앙과 교육에 앞장선 인물이다.

신앙이 좋은 집안인 줄 알고 시집 온 김리브가는 깜짝 놀랐다. 시집 식구들이 마귀 시험에 넘어가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김리브가는 밤새 통성으로 기도했다. 김리브가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들이닥친 마을 사람들은 김리브가도 미쳤다며 강제로 머리를 밀기도 했다.

김리브가는 오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경주 김 씨 집안을 믿음의 가문으로 다시 세우며 아들 김인원(후에 장로)에게 굳센 믿음을 물려준다. 10절이 넘는 찬송가를 200여 수나 외워 부르며 전국에 복음을 전해 ‘찬송 할머니’라는 별칭을 얻은 김리브가 권사는 신앙의 기쁨과 삶의 고단함을 찬송가로 승화했다. 단순히 부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손수 가사를 짓기도 했다. 김리브가 권사가 찬송가 곡조에 맞춰 가사를 만들어 부른 것과, 오래 전부터 교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온 4·4조의 ‘민중 찬송가’를 모두 기록해 엮은 노래책을 남겼다.

존스와 이승환이 뿌린 복음을 받아들여 못자리를 만든 김초시 일가. 복음은 한 세기를 훌쩍 넘기고 5대를 이어 전해내려 오고 있다. 강화지역의 어머니 교회인 교산교회를 시작한 그 믿음은 강화 전지역 120여 교회를 일구어낸 원동력으로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선교역사기념관 설립과 장학사업 펼치며 신앙의 대 잇기 운동 벌일 터, 김상임 전도사가 강화에 미친 영향이라면 어떤 걸 꼽을 수 있나.

 처음에 이승환이란 분을 통해 복음이 들어왔다. 이승환은 서민이었고 김상임은 유력한 양반이었다. 또, 서당을 하던 훈장님이자 이 지역의 유지였기에 그분이 개종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많은 분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특히 홍의교회를 개척한 유학자 박능일이 있다. 홍의마을 훈장으로 김상임과 동지였는데, 김상임의 개종을 따지러 왔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강화에 복음이 퍼져나가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교산교회의 한국기독교회사적 의미는.

 강화의 어머니교회다. 강화는 기독교계의 모판과 같은 곳이다.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강화에는 현재 122개의 감리교회가 있다. 군 단위로는 가장 많은 교회가 있는 셈. 강화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퍼져나가는 데 모교회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점이 큰 의미다.

 올해로 교산교회는 117주년을 맞았다. 옛 선배들의 신앙전통을 잘 살리기 위해 어떤 활동이나 역할을 할 예정인가.

 지난 2004년 110주년 기념예배당으로 존스 선교사의 이름을 따 존스예배당을 봉헌했다. 교인들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인천내리교회와 강단 교환 예배를 드렸다. 1893년에 같이 들어온 성공회 강화읍교회와도 교환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2004년에는 강화복음전래기념비 건립했다.

 현재 진행 중인 사업으로는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사업이 있다. 장학기금 5천 만 원을 목표로 모금 중이다. 또 우리 조상들의 신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신앙의 대 잇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다 빠져나가고 급속도로 고령화 되고 있는 이 때 신앙의 대를 잇는 일이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1959년에 지어진 구 예배당을 선교역사기념관으로 꾸밀 예정이다. 이름은 ‘김상임예배당’이라고 지어놓았다. 이승환이 선상세례를 받았던 곳과 다리목에 있던 초기 예배당, 이승환 생가 등 유적을 복원하고 후세에 알리는 일도 계속해서 해나갈 것이다.

 현재 김상임 전도사와 김리브가 권사 후손들의 활동은.

 다리목 김상임 전도사 생가가 위치한 곳에 살고 있는 경주 김 씨 후손들이 70%나 된다. 후손들 중에 목회를 한 이도 여섯 분이나 된다. 지금도 교산교회를 장로, 권사 등 중직으로 섬기고 있다.

 

주간기독교 이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