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협 9워 월례회 김윤희 박사의 발제문 전문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는 11일 금요일 오전7시 화평교회에서 "한국교회와 십자가의 길"이란 주제로 한복협 월례회를 가졌다.

다음은 김윤희 박사(횃불트리니티) 발제문 전문..

<구별하라> (Set Apart, 켄트 휴즈 지음)는 책에서 휴즈는 세상 속의 교회를 향한 거룩으로의 부르심을 이야기하면서 교회가 얼마나 세속화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물질주의에서의 탈출, 쾌락주의와의 전쟁, 육신의 소욕, 폭력과 관음증, 성과 신앙, 절제, 다원주의의 함정, 결혼과 이혼 등의 그의 책 제목들만 보아도 교회 속에 들어와 있는 문제점들이 세상의 주간지들의 제목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조지 갤럽, 바나 리서치, 크리스처니티투데이닷컴을 포함한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들은 이구동성으로 복음주의 기독교가 점점 더 세속 문화의 거울 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17, ‘구별하라’). 한 예로 <바나리서치>가 2000년도에 발표한 결과를 보면 ‘그리스도인 부부의 이혼율이 비 그리스도인 부부의 이혼율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7% 대 24%). 이러한 현상은 <Emerging Trends>라는 잡지 (2001년 9월호)에서 발표한 “종교는 성장하고 있지만 도덕은 후퇴하고 있다”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구별하라 17-18).

왜 이러한 현상이 있는가의 원인과 평가 중의 하나로 말씀의 부재, 성경에 대한 무지를 꼽고있다. 이것을 신약학자인 로버트 건드리 (‘분파주의자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 북미 지역의 복음주의, 특히 엘리트를 위한 오래된 원리주의의 선언’)는 오늘날 복음주의 자들이 하나님의 ‘메시지’ (‘Message’)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사지’ (Massage)를 하고 있다고 비평했다. 즉, ‘구도자의 감수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복지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락시키고 대신 그들을 마사지 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 마사지 속에는 세속성을 꽃피우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건드리 박사는 심지어는 노예화된 복음주의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많은 복음주의 자들이 세상에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세상의 매혹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건드리 박사는 초기 근본주의의 시도가 옳기는 했지만 1920년과 40년대 근본주의자들은 천박한 분리주의로 가면서 궤도를 벗어났고 자신은 새로운옛원리주의를주장하는데그것은사도요한의메시지?즉, 세상에사는동안세상사람들과도덕적으로구별된삶을살며담대하게복음을전하고하나님의메시지를가르치자는것으로정의했다. 그가 내린 ‘십자가의 길’의 정의라 볼 수 있겠다.

물론 이것은 미국의 복음주의의 현주소를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미국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기에는 우리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이 있다. 더구나 미국적인 것은 수출이 빠르다는 점도 간과 할 수 없다.

그 증거 중의 하나로 몇 년 전 개신교사 120년을 축하하며 한 공영방송에서 방송한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한 방송사의 조사가 개신교를 대변한다거나 그 시각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속인이 보는 한국개신교에 대한 시각을 우리는 귀 닮아 들어둘 필요가 있다. 방송사의 조사결과 한국교회의 No. 1 문제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Materialism and Secularism)라고 우리의 영적 현주소를 지적했다. 미국의 복음주의를 비판한 내용과 실제 큰 차이가 없다. 또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조사를 했는데, 기독교인들 스스로 답한 개신교의 문제로 1. 자기중심적, 이기적 경향; 2. 성장제일주의, 성공지향주의의 교회 성장론; 3. 목사님들의 무능함의 영적 리더십을 제시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므로 신자들이 바라보는 내부의 시각인 것이다.

그리고 평균 교회 재정의 3.8%만이 사회 복지에 쓰여 지고 대부분의 재정은 교회 건물 유지와 건물 짓는 데에 사용되었다고도 지적했다. 물론 방송이 편파적이고 개신교를 매도한 면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겸허히 그들의 비판을 듣고 생각해 볼 점은 분명히 있다. 이것은 어는 한 교회, 교단, 단체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총체적 위기감을 느껴야 할 부패의 시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쁜 그리스도인’ (Unchristian, 데이비드 케네먼, 게이브 라이언 지음)이란 책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현대기독교인의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로 ‘빅 3’의 결과를 얻어 냈는데 그것은 ‘반동성애적’ (91%), 타인을 판단하려 한다 (87%), 위선적이다 (85%) 였다. 그것에 더해 부정적인 이미지로 기독교인들을 ‘매우 보수적이고, 자신들의 사고의 틀에 갇혀 있고, 낙태 반대론자에, 항상 화가 나 있고, 비논리적이고, 자신들만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사람들이며, 구식이고, 지나치게 정치적이며.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타인에게 둔감하다, 지루하다’등으로 보고 있다. (42-4). 이것도 미국적인 것이나 특히 젊은이들의 생각이라는 점에서 한국 젊은이들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책의 저자는 외부인들(기독교 외부에서 내부를 바라보는 개인)의 이와 같은 부정적 선입견은 기독교를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미지 문제 이상’이라고 진술한다. 또한 이러한 선입관이 누구의 잘못이냐를 지적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만약 우리가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음세대와 소통하지 못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외부인들은 기독교는 바이러스에 걸린 컴퓨터 파일이나 혹은 인화가 잘못된 사진과 마찬가지로 원형을 잃어버렸다며 그러한 기독교를 거부하고 있다 (46). 이런 기독교는 외부인뿐 아니라 내부 인인 나도 거부한다.

해결책의 일환으로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 (존 맥아더 지음)에서 맥아더는 현대기독교의 문제 중 하나로 ‘성경의 충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성경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언제나 원수가 따라 붙는다. 불신자들은 성경의 신빈 성에 도전한다. 회의주의자들은 성경의 정확성을 의심한다. 도덕적 수정주의자들은 성경의 교훈을 평가 절하한다. 종교적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초자연적 성격을 반박한다. 광신자들은 성경의 의미를 왜곡한다”고 성경에 대해서 흥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더한 문제점은 성경의 필수적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조차 그리고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의 성경의 영감에 대한 핵심구절을 잘 이해하고 믿는 사람들 조차도 복잡하고 세련된 요즘 시대에 교회를 잘 섬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성경에 다 있다고 믿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점점 심리학, 경제, 정부, 정치, 오락, 또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성경에는 없는 성공비결을 제공해 줄 만한 다른 어떤 분야에서든지 인간의 전문지식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러한 현상을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지 않는 증거로 보고 있다.

‘한국교회’를 논해야 하는데 서양, 특히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이유는 그것이 간접적으로 한국교회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이 많이 번역되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도 충분히 공감이 가기 때문인 것을 시사하는 반증이 된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이 짧은 지면을 통해 논하거나 다룰 수는 없다. 단지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 자체가 해결책을 요약적으로 주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위의 비판의 내용들의 반대국면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그 중에서 ‘여성사역자가 보는 십자가의 길’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성과 남성이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기본적으로 원리가 다르다고 생각지 않는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열면서 많은 사람들이 21세기를 ‘여성의 세기’로 정의 하고 있다. 이것을 남성과 여성의 대립구도로 볼 것이 아니라 이런 세기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새겨보는 것이 더 생산적인 토론이 될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저서에서 (‘문명의 충돌’) 냉전의 종식과 함께 국제정치의 가장 심각한 분쟁을 문명들간의 충돌로 보았다. 그 문명권을 구분하는 1차 기준을 종교로 보았으며 그 중심에 기독교 서구문명 vs (對) 이슬람 및 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충돌이 있을 것으로 예견했다. 그 시각을 도입해 본다면 ‘여성의 세기’를 열어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백투 예루살렘’ (Back to Jerusalem)으로 가려면 우리는 선택의 여지없이 북한과, 중국과, 이슬람문명권을 넘어서야 한다. 이들을 복음화 하는 데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 없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마지막 보루인 이슬람문명권과 기독교와의 대면에 있어서 여성들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이슬람 여성들에게는 어떤 남성의 접근도 허락되지 않는다. 여성만이 그들의 여성에게 다가갈 수가 있다. 또한 회교도인들을 전도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회교도전도는 어쩔 수 없이 순교를 동반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쉽게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다. 폭력적인 저항도 계속될 것이다. 구원을 보장 받기 위한 그들의 신학이 자살폭탄을 지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진정한 회교에는 그런 교리가 없다고 주장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여성들을 취급하는 방식이다 (예: 일부다처, 여성 할례, 히잡등의 복장등). 언젠가 모슬렘 여성들의 의식이 변하는 순간, 그들의 인권이 얼마나 유린당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잠재력들이 사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 내부에서의 붕괴를 예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외부의 기독교 여성들이 필요하며 모슬렘 여성들이 복음에 대해 눈을 떴을 때에 그들을 인도해줄 성숙한 여성 리더들도 수없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 여름에 아프리카 선교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우간다, 탄자니아), 여러 가지 여건이 열악해 보이는 그 곳에서도 여성들이 교육과 리더십에 대해 눈이 떠가고 그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있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워낙 필요가 절실하다 보니 남성목사님들도 여성의 가르침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이제는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논할 때가 아니라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으로 실력을 갖춘 하나님의 종들 (남녀구분 없이)이 무한정 필요한 시대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부족하다’는 말씀이 피부에 와 닻 는 경험을 했다. 영적인 필요가 있는 곳에 우리가 가지 않으면 모슬렘들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탄자니아도 영부인이 회교도인이라 그러한 영향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영적으로 긴급한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여성신도들을 격려하고, 도전하고, 훈련하고, 교육시키고, 예수님의 올바른 제자로 길러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들을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여성들이 앞으로 해쳐 나가야 할 ‘십자가의 요구’라 생각한다. 땅 끝까지 복음 들고 남성도 가고 여성도 가야만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 완수 될 수 있는 시기가 어느 때보다도 다가 온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달려가야 하는 여성들을 더 빨리 경주하도록 도와주지 않고 ‘여성’이라는 이슈를 가지고 뒤를 잡아당긴다면 그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은 우리각자가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으로 정의하셨다 (마 16:24). 십자가의 처형장으로 가기 위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신 것처럼 죄수들은 자기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다. 공적인 수치와 모욕을 모든 사람 앞에서 드러내면서 가야 하는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모두가 이런 길을 갈 때에 잘 갈 수 있도록,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 돕는 것이 정도(正道)일 것이다. 여성들의 세기에 여성들이 더욱 활발하게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는 것은 결국 더욱 험난한 제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디 한국교회가 여성과 남성 모두 그러한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밀어주고, 계속적으로 기도해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김윤희 교수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